
컨슈머타임스=김성수 기자 | "외곽, 변두리, 경계…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
토끼들의 섬에 수록된 열한 편의 이야기는 작중 배경, 초점 화자, 주제 의식 등 모든 면을 달리하지만, 초현실적 세계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어진다. '헤라르도의 편지'에는 은근한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와 이별을 결심한 여자친구가 등장한다. 남자친구를 향한 공포는 교외 여행지에서 마주한 음험한 숙소, 기괴한 주인, 이상한 숙박객 무리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의 언저리에서 끓어오르다가 사라지는 유령 같은 존재로 구현된다.
'꼭대기 방'의 젊은 여성은 거주비 절약을 위해 자신이 근무하는 호텔 꼭대기 방에 기거한다. 여성에게 주어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은 꿈속으로 침범해오는 타인의 꿈이라는 환상적 기제로 표현된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를 배경으로 실제 역사와 허구를 혼합한 '미오트라구스'에는 뒤틀린 자의식으로 '여자아이 사냥'이라는 끔찍한 놀이를 하는 대공이 등장하는데, 소설은 멸종 동물 '미오트라구스'의 책임을 대공에게 묻는 듯한 고발적 시선을 담아내며 가난한 어린 여성을 착취하는 부유한 성인 남성과, 환경을 착취하는 인간의 탐욕을 대구를 이루어 보여준다.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를 통해 엘비라 나바로는 젠더, 공간, 계층, 환경, 역사 등에서 거칠게 이분된 관념을 전복하고 무화할 수 있는 지점을 탐구한다. 남성 대 여성, 도시 대 변두리, 자본가 대 노동자, 자연 개발 대 환경 보호, 기록된 정사 대 기록되지 못한 미시 서사 등에서 뒤편으로 밀려난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 이처럼 소외되거나 외면받거나 무시되어온 대상을 서사의 중심 요소로 삼는 행위는 현실의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려는 시도다.
환상의 표피를 덧입혀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은 결국 더 나은 현실을 꿈꾸는 일이다. 불문에 부쳐온 절망, 공포, 소외를 이야기해 온 엘비라 나바로의 소설을 지금 여기의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