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임진왜란 거점지, 가라쓰 왜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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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임진왜란 거점지, 가라쓰 왜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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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바닷가 마을이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오징어잡이와 농사로 먹고 살던 어촌 가라쓰(唐津)는 일순간에 인구 16만이 집결하는 군사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한 해 전(1591)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준비를 위해 일본 전역에서 3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대륙침략 준비작업으로 가라쓰에 대형 성곽축조작업을 강행했다. 히젠 나고야성은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대규모 공사였다. 단 5개월 만에 왜군후방사령부가 완성되었다. 대단한 속도전이었다.

도요토미는 천민출신이다. 전국시대 일본의 서남부 시코쿠와 규슈를 평정하고 천하를 손에 넣었지만 다이묘(지방영주)를 거치지 않은 까닭에 정통성이 떨어져 권력은 불안정했다. 일부 다이묘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대륙진출은 예정된 선택이었다.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노렸다. 당시 최고의 재물로 여겨졌던 명나라의 은(銀)이 목표였다. 국내 권력을 굳건하게 다지려면 은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서 만들어진 병기들은 가라쓰로 옮겨졌다. 분주하게 선박을 만들고 군수보급기지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강압과 희생이 있었는지는 근처 박물관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었다. 토요토미는 규슈출신의 온건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강경파 가토 기요마사를 양 선봉장으로 경쟁시키며 삽시간에 조선을 유린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임진왜란이다.

 

▲히젠 나고야 옛 성터 입구에서
▲히젠 나고야 옛 성터 입구에서

한때 수십만이 붐볐던 성곽의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히젠 나고야성은 급진축조 후 10년 만에 허물어졌다. 임란과 정유재란이후 도요토미가 병사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성의 철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성을 축조한 히데요시의 심복 데라자와는 이미 도쿠가와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성을 허무는데도 선봉장이었다.

옛날부터 조선의 동래와 규슈의 가라쓰는 교류가 빈번했다. 왜인들은 가라쓰에서 이키섬, 쓰시마(대마도)를 거쳐 동래로 들어왔고 조선의 통신사는 역코스로 건너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곤 했다. 나라 전체를 동원해 전쟁준비를 하는 일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란에 몰린 조선의 왕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임금과 지배세력들은 피신하고 비극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박물관에서 확인한 낡은 기록은 분노를 다스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 코 308개', 조선인 몇 명을 죽였는지가 나중에 군졸들의 보상기준이어서 베어낸 코의 숫자를 제출한 증거물이 남아있었다. 히젠 나고야 박물관이 임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건립되었다는 안내와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참담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히젠나고야성터, 주춧돌과 흔적만 남아있다
▲히젠나고야성터, 주춧돌과 흔적만 남아있다

히로시마에서 6시간 운전하고 온 중년의 일본인 남자 방문객과 같이 성터를 걸었다. 조선의 고통을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거듭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란 후 400년이 지났지만 아픈 역사는 평원 곳곳에 남아 있었다. 히로시마 중년과 나는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 미소를 주고받는 인사로 헤어지고 말았다.

바다가 보이는 나지막한 폐허에는 주춧돌 몇 개와 안내판이 남아 있었다. 군대와 양민까지 한때 수십만이 살았던 지역의 모습치고는 알 수 없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도요토미는 고향 나고야(名古屋)를 생각하며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를 선택해 군사기지를 만들었고 속전속결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히젠 엣 성터를 내려와 가까운 요부코 항구를 찾았다. 규슈 일대에서 일부러 찾아와 먹는다는 유명한 오징어 회 한 접시로 허기를 때웠다. 도요토미는 전쟁에도 실패하고 천하통일에도 밀려나 눈을 감았지만 해변 언덕에 그를 위한 신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정문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구조였다. 다지마(田島) 신사는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새소리만 가득했다. 일본인들에게 조차 잊혀 져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느낌이었다.

 

▲가라쓰 요부코 항구의 다지마 신사
▲가라쓰 요부코 항구의 다지마 신사

니지노마쓰바라(虹松原)의 소나무 숲은 울창했다. 맑은 바다 가라쓰 해변 백사장을 끼고 무지개(니지) 모양으로 길게 드리워진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동차를 세우고 소나무 숲속에 들어가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히젠 나고야성을 축조한 데라자와가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만든 방풍림이 현재의 명물로 남게 되었다.

당시 도요토미가 한번 호령하면 이곳의 소나무 숲이 일제히 울렁거렸다는 현지인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엇갈린 시각과 관찰 때문이었으리라.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보려했지만 아픈 기억과 역사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감정이 일렁거리게 했다.

규슈 북서쪽의 끝, 이 아름다운 고장 가라쓰 해변에서 잔혹한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싶었다. 대륙정벌의 야심으로 세워진 고을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요요카쿠(洋洋閣) 료칸은 역사가 깊다. 120년 전 만들어진 목조 건물로 일본식정원이 중정(中庭)에 잘 디자인되어 있었다.

 

▲니지노 마쓰바라, 무지개 모양 소나무숲 너머 백사장이 있다.
▲니지노 마쓰바라, 무지개 모양 소나무숲 너머 백사장이 있다.

오늘날 아름다운 볼거리로 관광지가 된 가라쓰성은 히젠나고야 성을 허물어 그 재료로 지어졌다. 망루에 오르면 맑은 날 가라쓰 앞바다 이키섬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가라쓰에서 대병력이 선박으로 출항해 이끼 섬과 쓰시마를 거쳐 동래포구까지 질주했다. 직선거리로 230킬로미터 지근거리다. 가라쓰의 해상교통은 후쿠오카나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부산이 훨씬 편하다. 가라쓰(唐津), 또는 한진(韓津)이 된 이유다.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와 한반도 해상교류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마이즈루 공원의 가라쓰성은 학이 춤추는 형상이었다. 마이즈루(舞鶴)성은 일본근대까지 오랫동안 잊혀 졌다가 1993년 해자와 석벽이 복원되었다. 대한해협을 거쳐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지만 지나간 전란의 기억을 묻는 이들은 많지 않다. 히젠나고야 성터에서 보이는 가카라 섬은 백제 무령왕이 탄생한 곳으로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왜란에 끌려온 조선의 도공들은 명품 도자기 '가라쓰야키' 를 남겼다. 일본이 자랑하는 도자기 산업의 역사적 출발점이다. 가라쓰야키는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오다가 아리타 도요지가 떠오르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도자기의 정신적 발원은 가라쓰야키다.

 

▲마이즈루의 가라쓰성. 맑은 날 오키섬이 보인다
▲마이즈루의 가라쓰성. 맑은 날 오키섬이 보인다

가라쓰는 사가현의 두 번째 도시지만 역동적인 느낌은 적었다. 한일 해저터널 시험공사가 진행되면서 한때 이 지역이 주목받기도 했다. 섬나라 일본의 역사적 숙원은 대륙과의 연결이다. 후쿠오카에서 가라쓰와 해상 이키섬, 쓰시마와 부산을 관통하는 대동아종관철도(1930) 구상은 실패했지만 그 꿈을 아직도 버리지는 않았다.

한일 해저터널은 20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 철도와 자동차가 동시에 통행하는 설계로 구상되고 있다. 터널 시발지의 시험 공사 후 현재는 중단 상태다. 명나라와 조선을 노렸던 16세기 일본은 다시 대륙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면서 21세기를 보내고 있다. 해저가 연결된다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가 열릴 수도 있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소용돌이는 아직 끝나지 않은 대본이다. 어떤 미래가 올지 알 수 없다. 시간에 따라 물리적으로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합집산이 이뤄질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지나간 역사를 넘어서는 자세다. 우리가 기억하는 '임진왜란'과 일본이 기억하는 '조선출병'의 간극이 더 엷어져야 미래의 시간이 그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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