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 친잔소에서 만난 바쇼는 다시 하이쿠에 대한 감전의 시작이었다. 동백꽃 동산에 지어진 정원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만개한 꽃들이며 고즈넉한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가든은 시간이 멈춘 듯한 또 다른 세계였다. 울창한 숲으로 감춰진 정원 속 호텔은 고풍스런 별장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이곳 쯔바키 야마(동백꽃동산) 에서 오래전 상수원 관리직 (1677년) 으로 일했다.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근처 간다 강의 오염을 막기 위한 파수꾼 이었다. 에도시대를 살다간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하이쿠의 최고봉이다. 아직도 현대 지성들을 압도하는 하이쿠의 성인(俳聖)으로 대접받고 있다.
"방랑에 병들어/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旅に病んで/夢は枯野を/かけ廻る)".
임종 사흘 전에 썼다는 바쇼의 하이쿠 한수는 오랫동안 나의 감정을 적셨다. 가슴속에 격렬한 파도가 일렁이던 젊은 날부터 잔잔해져 지나치게 평화로워진 지금의 시간까지 함께한 문장이었다. 바쇼의 시적 언어 속에서 방랑과 꿈과 들판을 목말라하며 거친 세월을 지나온 느낌이다. 그의 젊은 날 기억이 남아있는 호텔 '친잔소(椿山莊)' 는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바쇼는 친잔소 숲가에서 하이쿠를 지으며 소박한 시간을 보냈다. 일본역사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오랜 전쟁이 지나고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17세기 초엽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찾아온 평화기였다. 에도(도쿄)가 새로운 도읍지로 조성되어 모든 것이 상승하던 시기 간다 강 유역의 이 울창한 숲은 바쇼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친잔소는 정원이 아니라 겉에서는 내부를 알 수 없는 자연 숲 그 자체였다. 14세기 중반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쓰바키 야마(동백나무 산)'가 시작이었다. 에도시대 다이묘 구로다 가문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훗날 메이지유신의 영웅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가 저택으로 구입해 '친잔소'로 문패를 달았다. 간다 강에서 언덕을 따라 올라오면서도 내밀한 숲의 존재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메이지 유신의 본고장 야마구치현 하기 출신인 야마가타는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수완을 발휘한 인물이지만 문화에 관심이 깊었다. 전통 시(詩) 와카를 즐기며 정원 조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수상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아끼던 정원이었다. 친잔소를 교토의 무린안, 오다와라의 고키안과 함께 미학적 명소로 만든 주인공이다.
에도를 대표하는 정원사 이와모토 가쓰고로의 손에서 탄생한 친잔소는 야마가타가 희망했던 디자인이 반영되었다. 연못을 특징으로 조성된 숲은 꽃꽂이의 대가 등 많은 문화인들의 손길을 거쳐 명원(名園)으로 다듬어졌다. 일본 정원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친잔소는 메이지 천황을 비롯한 당대의 정객들이 중요한 회의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인 바쇼는 일본 중부 미에현에서 재야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농사일도 돕고 허드렛일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생활이 어려워져 지역 유지의 시종으로 들어갔다. 주인 무네후사 집안에서 하이쿠를 배웠다. 하지만 주군이 25 세로 요절하자 갈 곳이 없어진 그는 하이쿠 방랑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바쇼의 일생은 여행이었다. '노자라시 기행', '가시마 기행' 등의 기록을 남겼다. 제자 가운데 카와이 소라와 함께 겐로쿠 2년(1689) 6개월 동안 도호쿠(동북지방), 호쿠리쿠(혼슈의 동쪽지역)를 돌아 기후현 오가키까지 여행했다. 이때 남긴 '오쿠로 가는 작은 길(?の細道)' 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작이다. 중세 시인 사이교 법사를 모델로 삼고 문학을 공부한 덕분이다. 방랑시인답게 최후도 여행 도중의 객사(51세)였다.
바쇼는 곤약(곤냐쿠)을 좋아했다. 그가 즐겨 먹던 곤약은 간다 강변 작은 가게에서 곤약젤리로 아직도 손님을 맞고 있었다. 구약감자로 만든 곤약의 쫄깃한 식감은 일품이다. 지난 천년 동안 최고문인은 누구인가 라는 아사히신문 설문에서 바쇼는 6위를 기록했다. 나쓰메 소세키와 시바 료타로에 이어 일본의 문장가로 평가 받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미시마 유키오 같은 근대 유명작가보다 더 좋아하는 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바쇼의 친잔소로 유명해진 이 정원은 훗날 재력가 후지타 헤이타로가 구입해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1945년 공습을 초래해 귀중한 건축물과 수목들을 잿더미로 변하게 했다. 이후(1948) 친잔소는 후지타 흥업이 구입했다. 창업자 오가와 에이이치는 '전후 황폐해진 도쿄에 녹음이 무성한 오아시스를'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1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정원재건에 힘을 쏟았다.
가든 레스토랑으로 재단장한 친잔소는 상류층의 피로연 파티 장소로 이름을 알렸다. 예식장과 연회, 외국인 리셉션의 명가로 도쿄를 대표는 브랜드가 되었다. '포시즌 호텔 친잔소 도쿄' 오픈(1992)과 정원의 상징 '삼중탑' 개수공사(2012)로 완성도를 높였다. 무로마치 시대 건물 '무차안(無茶庵)' 에서 메밀소바를 먹고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방문객들의 첫 번째 희망사항이다.
친잔소의 백미는 야간산책이었다. 에도시대 전통 도롱이 디자인 등불이 오솔길을 밝히고 시간마다 호수에서 인공으로 피워 올리는 물안개는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했다. 고이 노보리(잉어모습의 연을 걸어 남자아이의 성년을 축원)는 하늘을 향해 펄럭이고 지나가는 모든 계절이 정원의 연못에 담기는 시간이다.
모쿠슌도(木春堂)에서 이시야키(石燒. 돌판구이)로 저녁을 먹고 한잔 걸친 기운으로 친잔소 정원을 두 바퀴나 돌았다. 후지산에서 가져왔다는 화산석 돌 판에 구워내는 요리는 일품이었다. 친잔소는 아사히 TV의 '마츠코 디럭스 방송' 에서 소개한대로 밤의 거리를 배회하기 적당한 장소다. 바쇼의 유적이 남아있는 히고 호소카와 정원을 돌아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 작가 나츠메 소세키((1867-1916) 산방까지 걸었다. 와세다 대학으로 이어지는 간다 강변을 돌아오니 만상의 신록이 깊은 밤을 만나고 있었다.

한줄 시어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이쿠는 일본의 단가다. 우리의 짧은 시조와 비슷한 듯 다르다. 자연을 벗 삼아 인생과 시간을 노래하는 독특한 문학이다.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일본 사무라이들이 지적 희열을 느끼는 방법이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틈에 끼어 가끔 하이쿠 모임에 나간 경험은 특별했다. 시를 쓴 뒤 돌아가며 발표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은 이들이게 주일 예배 같은 의식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는 5-7-5 구성으로 17자 한줄 정형시다. 450년 전 시작되어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즐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비롯한 현대 시인들이 자국의 언어로 하이쿠를 작문한다. 짧아서 함축적이고 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매력 때문이다. 말의 홍수시대에 자발적으로 말의 절제를 추구한다. 생략과 여백으로 감동을 준다.
古池や蛙飛び?む水の音 (오래된 연못/개구리 한 마리 뛰어드는/물소리 들리네).
夏草や兵どもが夢の跡 (여름 나절 풀/수많은 병사들이/꿈꾸던 자취).
인생은 시간을 타고 조금씩 멀어져 간다. 개구리도 물소리도 아닌 적막함의 시어가 정제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찬란한 시간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인간들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벌판에 갇히곤 한다. 풀잎 같은 병사들의 자취만 처연하다. 바쇼의 하이쿠는 시간과 죽음을 그려낸 수채화 같다. 감추어져 아름답고 숨겨져 빛난다. 친잔소의 적막감과 수수함으로 짜여 진 비단 같은 문장들이다.
늦가을 쯤 다시 친잔소를 방문한다면 그때 암송하고 싶은 하이쿠 한 수를 미리 골라 두었다.
"나그네라고/ 이름을 불러주오/초겨울 가랑비"
산다는 것은 어차피 미래를 알 수 없는 방랑길이다. 자연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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