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컨슈머타임스=강나연 기자 | 정부가 올해부터 '전기 저수지'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도입하면서 2038년까지 약 40조원의 대규모 배터리 ESS시장이 열린다.
미국·유럽의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 이차전지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요인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압도적 가성비를 앞세워 세계 ESS 시장을 빠르게 장악한 중국 기업들의 강력한 공세가 예상되는 만큼 정부의 정교한 정책 운영과 가격·기술 경쟁력을 높이려는 업계의 치열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2일 540MW(메가와트)의 배터리 ESS를 전국에 도입하겠다면서 사업 입찰 공고를 냈다.
사업자가 2026년까지 ESS 설비를 구축하고 15년간 고정 가격을 적용받아 전력거래소의 급전 지시에 따라 전기를 충전하거나 공급하는 사업이다.
요구된 충전·방전(공급) 시간은 최대 6시간으로 기준을 맞추려면 총 3240MWh(메가와트시) 용량의 배터리 ESS를 설치해야 한다. 80kWh(킬로와스티)의 배터리를 단 고성능 전기차 4만대에 들어갈 분량이다. 관련 시설 투자비는 총 1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업이 정부의 관리하에 이뤄지는 대규모 배터리 ESS 사업 시장이라는 점에서 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전력 수급을 통제하는 전력거래소의 지시에 따라 운영되는 ESS 설비가 전국적으로 도입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기 저수지' 역할을 하는 ESS는 탄소중립 전환 흐름 속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기 수급 관리는 원전 같은 기저 전원이 일정한 발전력을 유지한 가운데 출력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등 화력발전이 보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태양광, 풍력처럼 수요와 관계 없이 자연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변동하는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증가하면서 수급 관리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봄가을처럼 전기 수요는 적은데 발전이 잘 돼 전기가 남아돌거나, 더운 여름날 밤처럼 수요가 커졌지만 태양광 발전은 멈춘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에는 전력망의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대규모 ESS가 필수로 떠올랐다.
그간 국내에서 ESS는 높은 투자 비용과 낮은 사업성, 화재 등 안전성 문제로 보급 속도가 더뎠다.
정부가 전국적으로 대규모 ESS 도입을 시작한 것은 재생에너지 규모와 비중이 향후 빠르게 늘어나 체계적 전력망 유연성 확보가 시급해졌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2023년 8.4% 수준에 그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기간의 마지막 해인 2038년까지 29.2%까지 증가한다.
설비용량 기준으로는 증가 폭이 더 크다. 2023년 30GW이던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용량은 2038년 4배 수준인 121.9GW로 늘어나야 한다.
여기에 약 91GW의 태양광·풍력 발전 설비 확충이 필요하다. 최신 원전 1기 설비용량이 약 1.4GW라는 점을 고려하면 추가 설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공공·민간 차원에서 수백조원으로 추산되는 투자가 필요하다.
이에 맞춰 전력망 유연성을 확보할 ESS에도 대규모 투자가 뒤따른다.
지난 2월 확정된 11차 전기본에 따르면 2038년까지 총 23GW(기가와트)의 ESS 설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ESS의 양대 축인 양수발전소의 경우 현재 건설 중인 사업들을 제외하면 2036∼2038년이 돼서야 1.25GW 규모의 추가 건설이 가능하다.
따라서 2038년까지 약 20GW의 ESS를 대부분 배터리 방식의 ESS로 채울 전망이다. ESS에는 배터리 활용 외에도 공기 압축, 위치 에너지 활용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시도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규모 상업화가 이뤄진 것은 배터리밖에 없다.
생산 기술 발전에 따라 장기적으로 배터리 ESS 건설 단가는 앞으로 크게 낮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현 시장가를 기준으로 하면 정부가 요구하는 6시간 충·방전이 가능한 20GW 출력의 배터리 ESS를 건설하는 데는 약 40조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대규모 새 배터리 시장 개화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K-배터리 업계는 가성비를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강력한 점유율을 확보한 중국 기업들의 도전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연구회사인 로모션에 따르면 현재 중국 ESS용 배터리는 전 세계 ESS 용량의 약 90%를 차지한다.
지난해 전기차를 중심으로 한 전체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사용량 기준 CATL의 점유율은 37.9%로 중국 비야디(BYD)(17.2%)와 한국 LG에너지솔루션(10.8%) 등을 제치고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특히나 CATL 등 중국 기업들은 합리적 가격과 낮은 화재 위험으로 대부분 배터리 ESS에 활용되는 리튬인산철(LFP) 기술에 강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CATL의 경우 첨단 기술 개발을 통해 LFP의 유일한 단점으로 지목된 에너지 밀도까지 획기적으로 높여 주목받았다.
CATL은 지난 1월 한국에도 법인을 세우고 전기차 및 ESS용 배터리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태양광 설비가 대부분 중국산 태양광 패널로 덮였던 것처럼 수십조원에 육박할 배터리 ESS 산업의 성장 과실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배터리 ESS의 사업자를 선정할 시 국내 산업을 실질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장치들을 우선 두기로 했다.
산업부는 가격 요소 외에도 국내 산업 기여도와 고용 창출 효과 항목에 100점 만점에 24점을 부여해 주된 요인으로 따진다. 특히 배터리 완제품 외에도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 요소인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 인버터 등의 원산지와 조달 계획도 평가 대상에 포함했다.
ESS 사용 기간이 끝난 뒤 폐배터리 재활용성에도 점수를 부여한다. 당장 중국이 강점을 가진 LFP 배터리보다 가격은 높지만 재활용 가치가 높은 삼원계 배터리 기술에 강점을 가진 한국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의 보급 확대를 위해서 ESS가 꼭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업 참여 기업들이 국내 기업의 이차전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가점을 주는 등 유도하는 정책을 잘 설계해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