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식의 정치소비자 시선] 도그마와 억지를 벗어나야 대자유 만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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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식의 정치소비자 시선] 도그마와 억지를 벗어나야 대자유 만날 수 있어
  • 윤성식 고려대 명예교수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1년 06월 30일 0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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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유럽에서 처음 태동할 때 이성에 대한 신뢰가 특징이었습니다. 그런 탓일까요? 진보는 자칫 도그마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철저하게 해부되었습니다. 이성적 존재인줄 알았던 인간은 뜻밖에도 감성적 존재였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존재였습니다. 이성을 신뢰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은 도그마에 빠지게 만듭니다.

문재인 정부 내내 부동산 정책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도 하락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부동산 정책으로 힘들어하는 국민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다른 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도 증가했습니다. 부동산 정책 이슈가 모든 정치와 정책을 삼키는 형국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시종 일관 부르짖던 부동산에 관한 인식은 공급은 충분한데 투기가 문제라는 진단이었습니다. 2020년말에 가서야 비로소 공급으로 정책이 선회합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비판의 초점이 되었지만 저는 김현미 장관만의 탓은 아니라고 봅니다. 청와대,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의 공동 책임입니다. 정권 초기에 보유세 인상을 건의했음에도 무시하고 뒷북을 친 기획재정부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공급은 충분하다는 도그마에 빠져 거의 3년을 허송세월한 정책 실패는 진보가 도그마에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저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표현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가에 대해 심층 분석에 들어가면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하지만 양대 정치 세력을 지칭하는 단어로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는 사용하기 편리합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당명을 바꾸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미국과는 달리 양대 정치 세력이 변화를 보여준답시고 당명을 워낙 자주 바꿔서 이제는 직전 당명이 무엇이었는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당을 이야기하기보다 편리한 표현법인 진보와 보수라는 표현법을 자주 사용하게됩니다.

자칭 진보는 한 번 도그마에 빠지면 마치 이성을 신뢰하는 이상주의자의 열정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은 나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방향은 잘 잡았는데 최저임금을 인상하여 성장을 도모하는 정책은 경제학에서 주류로 인정 받는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IMF나 월드뱅크에서 제시하는 경제정책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것으로 소득주도성장으로 불릴만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여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정책 도그마에 빠져 정권의 초반부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최저임금을 박근혜 정부처럼 완만하게 인상했더라면 시장이 적응했을텐데 급격히 인상하는 바람에 시장이 적응하지 못한 측면도 큽니다.

도그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해야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유연하게 적응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 진리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옳다고 하나에만 매달리면 정책 실패는 자명합니다.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변화에 민감하게 헤쳐나가야합니다. 마치 생물체가 환경의 변화에 진화하듯이 말입니다. 자신 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진보는 자꾸 분열합니다.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도그마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는 수학문제풀이도 아니고 바둑판이나 장기판도 아닙니다. 모순과 모호함의 딜레마적 세상에서 모두가 불만이지만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인간의 몸부림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용납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에의 집착은 진보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여당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습니다. 여당의 분열이 노무현 대통령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분열에 대해 걱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분열은 여당 내부 일부 이상주의 정치인들의 단견적 사고의 결과로 보입니다. 진보의 생각은 보수와 달리 다양한데 각자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분열하면 정치 세력으로서의 입지가 약화됩니다. 타협을 거부하고 독선으로 치닫는 경향은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망각하는 미숙함입니다.

미국의 보수를 보며 가장 눈쌀이 찌뿌려지는 특징은 억지입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트럼프가 보여주는 억지는 보수의 문제점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사례입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가 수없이 거짓말을 해도 지지자는 열광하며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쯤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가 낙선한 후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했지만 트럼프가 임명한 보수 대법관이 과반수 이상을 점유한 미국 대법원도 트럼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국민의 30% 이상인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는 부정선거라고 믿습니다. 미국의 보수만이 아니라 일본의 보수도 비슷한 특징을 보입니다. 일본의 보수도 억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한국의 자칭 보수도 제 눈에는 유난히 억지가 심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이준석 대표의 등장으로 보수도 억지에서 벗어나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되었습니다. 이준석 대표의 언어에는 억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그마도 억지도 사실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무언가에 빠지는 것입니다. 둘다 이분법과 흑백논리에 함몰되어 생기는 현상입니다. 둘 다 자신만이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기에 하나는 도그마로 나타나고 하나는 억지로 나타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칭 진보가 도그마에서 벗어나고 자칭 보수가 억지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대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보는 진보답게 진보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앞으로 전진해야합니다. 영국의 노동당은 보수당의 대처 수상이라는 희대의 강적 때문에 오랜동안 집권을 못했습니다. 급기야 노동당의 젊은 리더 토니 블레어는 보수당의 정책 영역에 뛰어 들어 노동당 답지 않은 정책을 채택하였고 그럴싸하게 기든스의 '제3의 길'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모방하여 '제3의 길'이라는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미국의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이 아닌 민주당 의원을 백악관에 자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면서 반대당인 공화당의 정책을 채택한 정부를 의회에서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블레어 수상, 클린턴 대통령 모두 상대방 정당의 영역에 진입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한 탁월한 리더였습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은 지극히 새누리당 답지 않은 정책을 대통령 선거 때 내세웠습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입니다. 아마 지금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단어를 접하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될 정도로 생소할 것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해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구호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였습니다. 물론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선거구호에 불과했지만 구호로 제시되었을 때 지지자의 아우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환호소리만 들렸습니다.

자칭 진보의 무상급식에 그토록 반대하던 자칭 보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상 보육에는 침묵했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상대 정당의 정책을 채택해도 선거 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블레어 수상, 클린턴 대통령 모두 진보정당의 리더로서 진보답게 상대의 정책영역에까지 뛰어 들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하였습니다.

세상은 절대진리가 없기에 우리가 신봉해야할 이념도 없습니다. 도그마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경계해야할 사람이고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계에서 도그마에 빠져 있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그마에 빠지면 모든 것이 변하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는 공통적으로 인종우월주의자임이 각종 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민자와 소수인종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저소득층이 트럼프의 지지자인줄 알았는데 소득에 관계 없이 자신의 지위에 불안과 불만을 느낀 백인 우월주의자가 트럼프의 지지자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백인 우월주의는 자신이 인종적으로 다른 인종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 또 하나의 이념입니다. 자신이 우월하기에 더 많은 이익을 거두어야 하는데 이민자와 소수인종이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자 나오는 반작용입니다.

보수란 기존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입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 자신의 우월적 지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월적 지위란 반드시 경제적 이익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이익이 훨씬 큽니다. 세상의 주도세력에 소속된다는 소속감이야 말로 평범한 시민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이익입니다. 물질적 정신적 이익에 집착할 때 억지가 나옵니다.

도그마나 억지는 모두 양극단입니다. 중도란 적당한 도그마, 적당한 억지가 아닙니다. 중도는 도그마와 억지를 떠나 걸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칭 진보도 도그마에서 벗어나고 자칭 보수도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억지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맛보았으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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