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 수없이 많이 펼쳐집니다. 우연히 감기에 걸려서 비행기 사고를 놓칠 수 있었던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나, 태평양 한 가운데로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같은 게 그런 부류지요.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러시아 남자도 있었구요.
하지만 소위 말하는 "기적"은 현실 세계로 돌아와보면 그다지 기적같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저번 주 로또 1등 당첨자도 8명이나 있었는걸요. 이런 식으로 손가락 힘 하나 안 들이고도 수십, 수억 원의 돈을 낚아챌 수 있는 '행운아' 들이 각 나라에 10명씩─그것도 매주─있다고치면, 100개의 나라에서만 매주 1000명의 행운아들이 나오는 셈입니다. 지나친 일반화이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일상에서의 행운이란건 길거리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회색 껌처럼 흔해빠지고 무미건조한 현상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초능력"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이건 누구에게나 '행운'이나 '기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능력을 바라보는 태도는 천차만별일뿐더러, 능력의 소유자 역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지요. 쉬운 예로 미드 [히어로]에서 클레어가 초반부 자신의 능력을 '괴물'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경멸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거든요.
어쨌든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중반부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끊임없이 사건 사고들이 터져나오고 "응? 얘는 갑자기 왜이러지?"하는 이유찾기에 혈안이 되지요. 그게 바로 미야베 미유키라는 여작가의 매력이자 마력이기도 합니다. 뚜렷하게 다가오는 캐릭터 설정도 그 중 하나죠.
태풍이 오는 날 겁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는 고등학생 소년, 신지. 그리고 그런 신지를 우연히 만난 잡지 기자 고사카. 이둘은 우연히 누군가가 열어둔 맨홀을 지나치게 되고, 맨홀 뚜껑 옆에 있던 작은 우산을 통해 그 시커멓고 두려운 공간 안으로 우산의 주인이었을 어린 아이가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지와 고사카는 인연을 맺게 되고 고사카는 신지가 가진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고사카라는 캐릭터 주변에도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게 되고요. 이후 고사카는 신지와 그의 친구인 나오야와도 인연을 맺게 되고 점점 더 그들의 미스터리한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서두에서 고사카가 밝혔듯이 이 소설은 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두 소년들의 이야기였으니까 말이에요.
소설은 그녀의 다른 작품인 [퍼펙트 블루]에서처럼 말도 안 되고 황당한 결과를 주지는 않습니다만, [마술은 속삭인다]처럼 여운이 남기는 결말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가벼우면서도 의미심장하지 않았지요. 그냥 너무 무거운 느낌이었어요. 영웅 전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작가는 나름대로 희생 정신을 통한 감동을 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캐릭터 보다는 신지 쪽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덜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신지가 헤게모니를 쥔 캐릭터였으니까요. 범인도 중반부터 너무 쉽게 드러나서 [모방범]을 읽을때와 같은 스릴감도 없었구요.
어쨌든 저는 미야베 미유키를 "다크서클 기버(Giver)"라고 부르렵니다. 이러쿵 저러쿵 해도 이 사람의 글은 흡입력이 대단하거든요. 덕분에 새벽 3시 반이 넘어서야 책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대로 잠을 자면 소설 주인공들 꿈이라도 꾸려나 했는데 피곤했기 때문에 램수면 따위는 무시한 깊은 수면으로 바로 고고씽, 덕분에 꿈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미야베 미유키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느낌입니다. 한 번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밤이 새는 것도 잊고 끝을 봐야 하니까요. 게다가 여작가이면서도 주인공들은 항상 남자─특히 청년, 소년이 많은데, 아마 그런 그녀의 성향 때문에 더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덧 : 방학은 좋아요. 좋아하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을 수 있고 시간의 구애도 없으니까요.
출처: 소유흑향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dnjsgl3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