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한국 영화계의 대표 감독과 대표 여배우의 합작품이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의 한석규, '박하사탕' 설경구, '오아시스' 문소리, '밀양' 전도연에 이어 16년간 스크린을 떠나 있던 윤정희를 캐스팅함으로써 촬영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영화는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외손자 정욱(이다윗 분)과 단둘이 살아가는 60대 여인 미자(윤정희 분)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시를 쓰는 애절한 과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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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과 시.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영화에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환상의 콤비다.
시는 힘겨운 삶의 무게와 고통스런 현실을 이겨 내는 수단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단 한 줄 쓰기가 쉽지 않다. 한 줄은커녕 단어 하나 고르기도 만만치 않다.
영화는 격정적 감정 노출을 자제해 대체로 차분함이 느껴진다.
주 배경인 지방의 한 도시를 가로지르는 작은 강이 영화 내내 스크린 아래로 졸졸졸 흐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결코 지루하거나 맥이 빠지지 않는다. 2시간19분 동안 잔잔하면서도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기교가 뛰어나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시 낭송 장면은 단조로움을 덜어주는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한다.
김용택 시인(김용탁 역)이 출연한 시 강좌에서는 동네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외모의 수강생들이 말하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시선을 붙잡는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솔한 얘기라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세밀한 심리 묘사도 곳곳에 숨어 있다.
"고양이 세수만 하지 말고 귀밑까지 싹싹 씻어."
동네에선 꽤나 산다는 강 노인(김희라 분)의 간병인으로 일하는 미자가 손자한테 버릇처럼 내뱉는 잔소리다. 관객의 머릿속엔 일바지(일명 '몸뻬') 차림으로 땀범벅이 된 채 강 노인의 몸을 구석구석 씻기는 미자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강가에 앉아 시를 적는 미자의 수첩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물인지 소나기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눈물 몇 방울로 담아 낼 수 없는, 사무치는 슬픔을 보여준다.
윤정희의 컴백 연기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손자의 비행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소녀 같은 감수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생활 속의 시를 찾아가는 할머니 연기를 보고 있으면 십수 년의 공백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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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결말을 매듭짓지 않고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시 강좌가 끝날 때까지 시를 한 편씩 써보자는 시인과의 약속을 지킨 건 미자뿐이다. 시를 자신의 빈자리에 대신 남긴 채 훌쩍 떠나긴 하지만.
미자는 손자에게 폭행당했던 소녀처럼 아주 먼 길을 떠나려고 다리 난간에 올랐을 수도 있고 시인이 강습에서 했던 말처럼 '절대 다가오지 않는 시상(詩想)'을 잡으러 정처 없이 낯선 곳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