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5군단 작전참모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1971년 장군으로 승진한 뒤 수경사 참모장, 사단장, 육군본부 교육참모 차장 등을 거쳐 1979년 11월 수경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불과 1개월 뒤 신군부에 의해 12.12 사태가 터졌고, 장 전 의원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진압에 나섰다.
장 전 의원은 훗날 신군부에 맞섰던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며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회고했다.
결국 신군부 진압에 실패한 장 전 의원은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서빙고분실에서 두 달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가택연금 및 강제예편을 당해야 했다.
12.12 사태의 충격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장 전 의원은 부친과 서울대 재학 중인 외동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와신상담한 장 전 의원은 1993년 당시 민주당 `12.12쿠데타 진상조사위'를 통해 공개증언에 나서며 `진실 알리기'에 매진했다.
군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2.12 사태에 대한 역사적 판단 이전에 사법적 처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12.12 사태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자 장 전 의원은 `군인의 표상'으로 추앙됐으며,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 등에서 12.12 사태 당시 목숨을 던져 쿠데타를 진압하는 모습이 소개되면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후 장 전 의원은 1994년 자유경선으로 당선된 첫 재향군인회장이 됐으며, 6년간 재향군인회를 이끌다 2000년 3월 민주당에 입당, 16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거머쥐었다.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장 전 의원은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지명돼 활약했고,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후보 보훈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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