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새벽(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루스텐버그에서 열린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 잉글랜드-미국전을 지켜보던 잉글랜드 팬들은 골키퍼 로버트 그린이 어이없는 실책으로 동점골을 허용하자 `골키퍼 악몽'의 재현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번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축구 종가'의 자존심을 살리겠다고 별렀던 잉글랜드에게는 결정적인 순간 골키퍼의 실책성 플레이로 패배하거나 다 이긴 경기를 놓친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2002 한일월드컵의 베테랑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 2006 독일 대회의 데이비드 제임스, 유로 2008 예선 탈락의 주역(?)이 된 폴 로빈슨과 스콧 카슨 등이 그 주인공들.
당시 팀 최고령 선수이던 노장 데이비드 시먼은 브라질과의 한일월드컵 8강전에서 브라질의 프리킥에 전진 수비를 했다가 허점을 노린 호나우지뉴에게 결승골을 허락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시먼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제임스는 2006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2-0으로 다 이긴 경기를 잇따른 실책으로 2-2 원점으로 되돌렸고, 폴 로빈슨도 유로2008 예선 때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실수로 결승골을 허용해 잉글랜드의 예선 탈락에 한몫하는 등 충실히 전통을 따랐다.
이날 그린의 실책도 그간의 악몽에 손색이 없었다.
그린은 전반 40분 클린트 뎀프시(풀럼)가 페널티지역 밖에서 시도한 강력한 왼발 중거리슛을 잘 받아내는 듯했으나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골문 안으로 흘려보내는 바람에 동점골을 허락하고 말했다.
그린은 후반 19분 조지 알티도르의 슈팅을 막아내는 등 선방으로 팀을 역전패 위기에서 구했지만 미국을 첫 승 제물로 삼아 종가의 자존심을 되살리겠다던 잉글랜드의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영국 언론들은 그린의 뼈아픈 실책에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일간 데일리메일은 `재앙'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로버트 그린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승리를 빼앗겼다"고 보도했고 `미러' 역시 "로버트 그린이 영국 축구 대표팀의 완벽한 시작을 망쳤다. 전반 30분 그가 너무 쉽게 클린트 뎀프시에 동점골을 허용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더타임스는 "단 한번의 처참한 실수가 승리를 앗아갔다"고 전했고 가디언도 "카펠로 감독이 그린에게 보낸 신뢰가 비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함께 경기에 임한 파비오 카펠로 감독과 팀 동료들은 그린을 두둔했다.
팀 동료 프랭크 램파드는 "그저 기운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고 우리는 한 팀이기에 그를 지지한다"고 말했고 주장 스티븐 제라드도 "뎀프시의 골은 충격이었지만 그 일로 골키퍼를 비난해서는 안된다"며 그린을 감쌌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 역시 "한번 실수를 했지만 후반전에서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말했다. 다만 오는 19일 알제리전에서 그를 교체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겠다"고 확답을 피했다.
그린은 경기 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그 볼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다"며 "이런 일을 극복할 수 있을만큼 정신적으로 강하다. 다음 경기에 영향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