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라이벌 YS-DJ '애증 관계' 막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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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라이벌 YS-DJ '애증 관계' 막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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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출고 2009년 08월 19일 0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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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둔 김영삼.김대중.정주영 세 후보의 모습.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오랜 애증의 세월도 종언을 고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잡았던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던 '맞수'였다.

출발은 달랐다. DJ는 전남 신안의 한 외딴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졸업이 전부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반면 YS는 경남 거제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

출신 배경은 상이했지만 두 사람은 야권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면서 한국 야당사의 고비 때마다 격돌했다. 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권력을 눈앞에 둔 외나무다리에서 드라마 같은 명승부를 펼쳤다.

역대 맞대결 전적은 2승1무1패로 YS가 우위였지만 DJ는 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호각세를 이뤘다.

야당의 양대 산맥을 갈라놓았던 것은 87년 야권 후보단일화 협상이었다. 서로 후보로 나서겠다고 해서 YS는 통일민주당, DJ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 민정당의 정권 재창출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대선을 앞두고 YS는 "DJ에게 양보하시라"라는 아들 현철씨의 말에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DJ가 후보가 되면 군부에서 가만 안 둔다. 정권교체를 못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DJ는 이후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것이 옳았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YS와의 관계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넘은 뒤였다.

DJ는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99년 펴낸 자서전에서 "나는 이때 나라도 양보해서 불출마를 단행하지 못한 것을, 그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일부 사람들의 일시적 흥분에 말려든 것을 지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87년 야권 분열 후 DJ가 먼저 눈을 감기까지 22년간 두 사람은 반목을 거듭했다. DJ는 문민정부 시절 집권을 위해 `어제의 동지'였던 YS를 맹렬히 공격했고, YS는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면서 반격을 가한 것.

특히 현철씨의 사면문제는 둘의 관계를 얽힌 실타래처럼 꼬이게 한 계기였다. 97년 DJ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YS의 검찰은 수사유보를 결정해 DJ가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길을 터줬으나 DJ는 반대 여론에 고민을 거듭하다 2000년 8월에 가서야 현철씨를 사면한 것.

YS는 이런 DJ를 배신자로 부르며 공세를 퍼부었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 등 이념문제를 놓고 YS는 보수, DJ를 진보의 목소리를 대표하면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지난 9일 DJ가 병환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일 때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YS는 지난 10일 DJ를 전격 문병, 화해를 선언함으로써 애증으로 점철됐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극적으로 반전됐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두고,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던 두 사람이 분열과 반목을 씻어내는 역사적 화합을 이뤄낸 것이다.

이날 DJ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빈소로 향한 YS는 자신이 "세계에 유례 없는 특수관계"로 표현했던 옛 민주화 동지의 영정 앞에서 과거 반목했던 시간보다 단결했던 시간을 추억했을 것으로 보인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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