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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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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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노 공항을 이륙한 헬기는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마닐라 만 상공을 날아올랐다. 여름내 달궈진 마닐라지만 11월부터 시작되는 동절기로 접어들면서서울의 초가을같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활동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준다. 헬기 뒷좌석 틈을 비집고

아키노 공항을 이륙한 헬기는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마닐라 만 상공을 날아올랐다. 여름내 달궈진 마닐라지만 11월부터 시작되는 동절기로 접어들면서 서울의 초가을같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활동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준다. 헬기 뒷좌석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상쾌함을 더해 줬다. 며칠 전 폭우로 잠겼던 시가지 외곽의 모습이 희끗희끗 보인다. 인구 1300만이 북적거리는 거대도시 메트로 마닐라와 피나투보 화산, 미 해군이 철수한 뒤 변해가는 수빅항의 모습, 인근에 건설된 한진중공업 조선소들이 상공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파시그강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루손평야는 절반쯤 물에 잠긴듯하다. 갯벌 같은 습지 곳곳의 흙탕물길을 따라 촌락을 이룬 모습들이 독특하다. 이런 수변에 산재한 주민들이 무려 350만 명이라는 기장의 설명이 믿어지지 않는다. 가난과 부패에 찌들어 마닐라를 탈출한 시민들이 나룻배 하나에 의지해 거의 수상생활로 연명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도시는 가난하고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현실에 갇혀 지내는 듯했다.

마닐라 시내는 상하수도와 도로, 전기 시설 등이 턱없이 열악해 수많은 주민들이 시내 중심가 하수구나 다름없는 개천가에서 난민캠프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도로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인 찌프니와 각종 차량이 뒤엉켜 눈앞에 보이는 건물까지 이동하는 데도 시간을 예측할 수 없을 지경이다. 루손섬과 민다나오로 나뉘어져 있는 주요지역은 치안이 불안해 최근에도 상대 정적의 가족과 관계자 30여명을 대낮에 피살하는 엄청난 사건들이 벌여져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전 세계가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시내전체가 가난과 부패에 찌들어 우선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몇몇 가문들이 부와 권력을 독식하고 있어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는 상황이다. 시민들 대부분은 대학을 나오고도 가난을 면할 길이 없어 홍콩이나 한국, 일본 등으로 가정부취업을 나서는가 하면 밤무대 가수로 윤락녀로, 남자들은 지구촌의 험하다는 공사판은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가 노동을 팔고 있다. 나라의 가난 때문에 민초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뉴욕타임스 마닐라 특파원을 지낸 리처드 할로란은 "필리핀은 치료법이 없는 곪은 상처 같은 나라다. 이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의 무능이다. 정부는 주민을 지원하고 쓰레기를 수거하며 아동들을 모아서 교육시키는 기본중의 기본마저 포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과거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부자 나라였다. 독재자 마르코스가 집권했던 1960년대의 필리핀은 우리보다 여러모로 형편이 나았다. 로물로가 UN총회 의장을 맡고 있었고 외교, 정치, 경제면에서 아시아의 리더역할을 했다. 1인당 GDP는 230달러로 당시 우리수준의 두 배를 넘었다.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필리핀을 따라잡자며 국민들에게 "잘살아보세"를 외쳤다. 마닐라에 유학을 가거나 근무여건이 좋은 필리핀 발령을 위해 외교관들이 줄을 댈 정도였다. 폐허가 된 서울을 떠나 선진학문을 배우러 마닐라 유학에 나서려면 서울에서 행세깨나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시내 복구를 위해 필리핀은 유엔 산하 한국부흥단의 주요멤버로 서울재건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참전은 물론 광화문 미대사관 건물과 정부 1청사(현 문화체육관광부)등을 짓기도 했다. 이렇다 할 물자하나 변변하지 않았던 한국으로서는 필리핀이 천금같은 원군이었다.

마닐라와 서울, 두 도시의 운명은 40년 후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에 근접하는 서울은 가난을 딛고 세계12위의 경제 무역대국의 심장부로 발돋움했다. 유엔총회 의장에 이어 사무총장을 한국인이 맡고 있다. 산업기술과 중공업은 물론 바이오, 우주산업까지 약진하고 있다. 현재 필리핀의 GDP가 2천 달러를 밑돌고 있다니 소득 면에서 열배를 앞선다. 정권의 수평적 교체와 민주화도 이뤄냈고 부정부패도 중간학점 정도로 개선됐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비슷한 기간을 통치한 박정희와 마르코스 두 지도자의 명암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40년 후 두 도시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할까? 2050년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한쪽은 실패에서 오는 철저한 반성을 준비하고 있고 한쪽은 성공에서 오는 오만함이 독버섯처럼 서서히 퍼져가고 있다. 한쪽은 적당히 해도 발전이지만 한쪽은 잘해야 본전이다. 왜냐하면 국가와 도시발전은 한계와 정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준비하는데 국력을 모아야 하고 갈등구조를 넘어서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국력신장보다는 내부의 갈등과 이념대립 등으로 얼룩져 세월을 보내고 있다.

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갈 것인가 다시 남미처럼 중진국 이하로 미끄러져 내려갈 것인가. 많은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경제의 미래는 예약된 것이 없다. 하기에 따라 수많은 갈림길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숨차게 달려왔던 과거처럼 호흡을 가다듬고 막판 스퍼트를 뽑아야 하는데 반환점을 돌았다는 나태함으로 자꾸 보폭이 느려진다. 쇠가 적당히 달궈졌을 때 내리쳐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대장장이처럼 속도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것처럼 40년 후 서울과 마닐라, 두 도시의 이야기가 완전히 뒤 바뀔 수도 있음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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