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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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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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무성했던 잎들은 가을바람과 함께 떨어져 흩날리고 낙엽과 고독이 남아 길어지는 가을밤을 적신다. 햇빛이 엷어지고 조락의 계절이 찾아오면 누구나 자연이든 인생이든 이별이라는 주제 앞에 선다."홀로 달빛아래 나와 그대에게 잔을 권하노니, 불러도 대답이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무성했던 잎들은 가을바람과 함께 떨어져 흩날리고 낙엽과 고독이 남아 길어지는 가을밤을 적신다. 햇빛이 엷어지고 조락의 계절이 찾아오면 누구나 자연이든 인생이든 이별이라는 주제 앞에 선다.
"홀로 달빛아래 나와 그대에게 잔을 권하노니,
불러도 대답이 없이 이승에 나 홀로 남았구나"
가을밤의 아픈 가슴을 노래했던 이태백은 서기 700년대 당나라 시대를 살다간 동양의 시성(詩聖)이다. 이태백의 시들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1860-1911)를 만나 <대지의 노래>로 부활한다.

체코태생으로 저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화가 구스타프 크림트와 동시대인이었던 말러는 모두 10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9번 교향곡은 당나라 시인 리 바이(이태백:李白)와 첸치(전기:錢起), 멍하오란(맹호연:孟浩然), 왕웨이(왕유:王維)등 당시 거장들의 서정시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작곡할 무렵 그는 죽음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린 딸의 갑작스런 사망에 이어 자신도 불치의 심장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러는 "교향곡을 쓰는 것은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개인적인 인생의 회한을 녹여 담금질한 불멸의 명작 <대지의 노래>를 완성해낸다.

그다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한 말러였지만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지휘자로 있을 때만큼은 그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베버를 만났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연작을 무대에 처음 올리는 등 일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을 보냈다. 이 당시 말러를 사로잡은 것은 무위자연이나 인간내면의 치열한 감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중국 당나라의 아름다운 시(詩)들이었다. 이제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학에서 접할 수 없었던 감동이 밀려왔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동양을 향한 말러의 동경과 놀라움은 대단했으리라 짐작된다. 한스 베르게의 번역시집 "중국의 피리"라는 시집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이곡은 10개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을안개가 푸르스름하게 호수에 일렁인다
마치 이름난 명인이 비취가루를 뿌린 듯 하구나
꽃들의 향기는 사라지고 차가운 바람만이 줄기를 구부린다
이제 곧 시들어 버린 연꽃잎들이 떠오르리라
세월에 밀려온 나의 마음은 이미 지쳤고 휴식이 필요하다
안식처여, 내가 너에게 가리니 휴식을 다오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나는 고독속에서 한껏 울리라
사랑하는 태양이여 다시 한번 대지에 떠오르지 않으려는가"

눈을 감고 한줄기 빛처럼 흐르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이태백의 주옥같은 서정시들이 가슴을 후비듯 처연한 아픔으로 소생해 온다. 아름다운 동양의 향수와 서양의 아련한 감수성이 빚어내는 음표들은 듣는이들을 어느덧 깊은 사색과 고독의 세계로 초대한다. 말러는 대지의 노래를 쓴 뒤 연주를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인사였던 것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루크너처럼 그 역시 교향곡 9번을 쓴 뒤 죽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임종에 직면해 말러는 가까웠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에게 이곡의 초연을 부탁했다.

발터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대지의 노래를 불러줄 가수를 찾아 영국까지 찾아 헤맨 끝에 케슬린 페리에 라는 여가수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부른 대지의 노래를 듣고 당시 청중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두드러진 대조, 갑작스런 기분변화, 격렬한 색채감, 거칠고 도발적인 장단, 숭고함과 저속함, 환상과 낭만, 신비주의가 버무려진 말러의 작품세계와는 극적으로 대비되는 처연함 때문에 이곡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이 절절히 가슴을 적신다. 며칠동안 당나라 한시집을 찾아서 말러의 심금을 울렸던 이태백의 시귀들을 음미해 보았다.

"태양은 산속에 숨고 서늘한 그림자 깔려 저녁이구나.
보라, 달이 어쩌면 저렇게 푸른 하늘에 은빛조각처럼 떠있는가.
꽃은 어스름 속에서 창백해지고
세상은 휴식과 수면으로 깊은 숨을 내쉰다.
이제 나는 깊은 잠속에 빠져들어 그대와의 마지막 작별을 기다린다.
오 나의 친구여 네 앞에서 이 아름다운 저녁을 즐기려한다
어디에 있는가 왜 나를 홀로 버려 두는가
나는 거문고를 들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정녕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는가
나의 방랑은 깊은 산속으로 고향으로 그리고 고독으로 떠난다
사랑하는 세상은 어느 곳에서나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나겠지.
언제나 지평선은 밝고 푸르게 빛나리라. 영원히---"

말러는 대지의 노래를 통해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의 대립적 세계관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교향곡이 항상 인생을 품어야 한다고 말해왔던 말러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작곡한 것이다. 전체 6악장으로 된 <대지의 노래>가운데 제1악장은 대지의 슬픔을 그린 이태백의 시가 배경이 됐고 2악장은 가을의 쓸쓸한 나그네 인생에 대한 첸치의 시를, 그리고 3악장 청춘과 4악장 아름다움, 5악장 봄에 취한 자들에 대한 이태백의 시, 6악장은 고별에 대한 멍하오란과 왕웨이의 한시들이 소리로 간직돼있다. 한 잔의 술과 가슴을 다독여주는 음악, 애잔한 친구, 별빛 같은 시, 잊을 수 없는 이별 등이 이곡에 연상되는 상념들이다.

말러 이외에도 당시 유럽에서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푸치니가 오페라 <나비부인>과 <투란도트>를 작곡해 무대에 올렸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서기 800년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 이상을 서양역사에 가려 조명되지 않았던 동양의 문화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고나 할까. 그때 노벨문학상이 있었다면 아마 이백을 비롯한 두푸(두보)와 쑤둥푸어(소동파)등 당송의 대가들이 휩쓸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 이글을 통해서도 강조했듯이 앙드레 군더 프랑크같은 학자는 "리오리엔트"를 통해 세계사의 중심이 이제 다시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물질과 경제의 발전뿐만 아니라 불교의 선(禪:젠ZEN사상)을 연구하는 서양의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가 하면 중국의 경극과 일본의 가부키 우리의 구성진 남도창을 문화인류학 측면에서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증가추세다. 아시아적 가치와 동양의 아름다운 정신문화는 확실히 세계인들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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