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 맨 얼굴
상태바
페르소나와 맨 얼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http://www.cstimes.com
2012.02.14

 

페르소나와 맨 얼굴

 

 

로마시절에는 모든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이 가면을 썼다. 훌륭한 배우는 자신의 감정과는 별도로 연기에 몰두해야 하고 그런 출연자는 로마 사회에서 유명세를 탔다. 이들이 쓰는 가면이 페르소나(Persona)다. 가면은 자신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당시에 무척 애용됐다. 나중에는 무도회나 단체 파티장까지 페르소나를 쓴 수많은 가면들로 북적였다. 드러내지 않고 싶은 인간의 위선적 속성과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는 2천년의 역사를 넘어 지금 세상까지 예술 방면으로 꾸준한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20년 전 필자가 법조계 출입기자 시절 박희태 국회의장은 법무부 장관이었다. 딸의 이중국적이 드러나 단명으로 끝이 났지만 민정당 의원으로 부활해 최다선에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장까지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잘 지냈다. 이력으로만 보면 도덕과 고결함이 브랜드여야 할 그가 돈 봉투 사건을 비서관 짓으로 호도하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봉투를 돌려 전당대회를 승리로 이끌었던 정무수석은 한술 더 떠 "아는 바가 일체 없다"며 오리발에 가세했다. 가면극에 환멸을 느낀 비서관은 작심하고 이 수준 낮은 구별 짓기의 이중성을 폭로해버렸다. 가면극의 끝은 적나라한 맨 얼굴 드러내기로 막을 내렸다.

한미 FTA를 만들 때 총리를 지낸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 장관이었던 정동영 의원, FTA 평가 위원장을 맡았던 김진표 의원이 한 목소리로 재협상 카드를 꺼내 미국대통령과 의회에 '공갈장'을 보냈다. 해달라는 때는 언제고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데 협상을 다시 하자니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상황이 달라졌으니 협상 내용을 바꿔달라는 주장이 그리 신선해 보이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될 기가 막힌 올려 치기다. 이쯤 되면 신의도 도의도 다 저버린 정치파괴 즉 네크로필리아의 충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정치만 하면 다 제정신을 잃는다. 이렇게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하면 아무도 절대로 자신의 맨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지구촌이 아우성이다. 시장의 성공이 낳은 비극이기도 하지만 대기업은 끝까지 커지고 중소기업은 한없이 작아지는 시대에 서있다. 자본주의가 다른 이데올로기처럼 실패를 경험했거나 적당하게 버무리면서 흘러왔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테지만 성공만을 반복해온 이력이 오히려 재앙의 씨앗으로 커가는 느낌이다. 부자와 서민, 가진 세대와 없는 청년, 기름진 쪽과 야윈 쪽, 큰 쪽과 작은 쪽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100조원 매출을 넘나드는 글로벌 기업총수의 자녀들이 빵집을 포기하겠다고 달래보지만 성난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 만두집, 두부가게, 외제차 딜러, 골목상권의 코 묻은 돈까지. 벌이가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포획해온 대기업들의 페르소나가 벗겨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승자가 전리품을 다 차지하는 약육강식 시스템이다. 여기다 대고 온정적 동반을 대입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강자가 무조건 이기고 몽땅 차지하는 초원의 동물세계 같다고 세상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배가 어느 정도 부르면 절대로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 사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밀림의 제왕인데도 끝을 보지 않는 사자의 동물 세계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정치가든 기업인이든 이 세상 1% 리더들은 언제나처럼 페르소나를 깊게 덮어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 가면을 벗겨보려고 무던히 애쓰지만 이들의 맨 얼굴을 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나선 프랑스의 릴리안 베탕쿠르나 미국의 워렌 버핏처럼 페르소나를 벗어 던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가 유리하도록 설계되었고 또 그렇게 흘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공동체를 위한 그 어떤 '뜨거움'을 함께 준비 할 때가 온 것 아닐까. 성장이 존중되면서 우리만의 따듯한 시스템으로 위아래가 공존하는 해법 만들기. 정부의 복지로 이 상황을 돌파하라는 책임회피는 너무나 가혹하다.

이 대목에서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지(1527-1602)의 자신을 깨부수는 '분서(焚書)' 정신이 사무친다. 모두가 페르소나를 위한 화장을 지우고 맨 얼굴로 어린아이 같은 동심(童心)을 회복해 인간의 순수성으로 세상을 대하자는 가르침 말이다.

"동심은 진실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견문(見聞)이 들어오면 동심은 없어진다. 어른이 되어서 도리(道理)가 쌓이면 동심을 밀어낸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견문과 도리가 넓어지고 아는 것과 가진 것이 더 많아 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면 동심은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재물로 가리려 힘쓰다 보면 동심이 사라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선두그룹들이 가면을 벗지 않고 세상의 근심을 외면한 채 부화뇌동하면 그 많은 지식과 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지는 다시 통렬하게 자기 자신을 꾸짖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 이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