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일본 야마자키증류소. 10억원짜리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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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일본 야마자키증류소. 10억원짜리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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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간다. 철은 녹슬고 모든 물건들 역시 스러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만물은 소멸을 향해 질주하는 세월의 칼날위에 서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종착지는 필멸이다. 그러나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오랜 시간을 견딘다. 기간이 지날수록 더 향기를 머금고 기다려준다. 놀랍고도 신비한 이야기다.

야마자키 증류소는 오늘날 가장 뜨거운 순례지가 되었다. 일본을 넘어 세계의 애호가들을 유혹하는 최고급 스타 위스키의 산실이다. 교토에서 기차를 타고 오사카 쪽으로 달리다가 내린 작은 역 야마자키에 전설 같은 마을이 있었다. 낮은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온 언덕은 오른쪽으로 텐노산(天王山) 대나무 숲을 끼고 있었다. 중턱에 산재한 계수나무(가스라) 군락이 그림 같았다. 철길 건널목을 지나 들어선 증류소는 평화로운 초봄의 햇살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야마자키는 고대부터 물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기즈가와(木津川), 가스라가와(桂川), 우지가와(宇治川) 등 세 곳의 하천이 모아지는 합류지점이다. 이 완만한 경사지에서 지하수가 솟아오른다. 언제부터인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의 축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래전부터 좋은 물 때문에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기억의 고장이다. 아침이면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햇빛이 이들을 한곳으로 묶어주고 지나가는 자리다.

 

▲일본 교토 야마자키 증류소 앞에서
▲일본 교토 야마자키 증류소 앞에서

야마자키 일대는 고대로부터 일본의 중심지다. 교토와 오사카, 고베, 나라 등이 지척이다. 에도시대 오사카에서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씩 쉬어가는 길목이 되었다. 교통과 물류의 거점이 만들어진 환경이다. 산토리 위스키의 창업자 도리이 신지로는 이곳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증류기 1개로 시작한 몰트위스키 제조(1923)는 그야말로 도박이었다. 스코틀랜드를 제쳐두고 일본에서 몰트를 만든다고?

신지로의 도전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발효증류기 4개 설치(1958), 증류기 8개(1967), 오크통 직발효 시스템으로 위스키 제조 성공(1987), 증류 가마 전격교체(2006), 창업 100주년 대개조작업(2023) 까지 이곳에서 역사를 이뤄냈다. 하쿠슈와 치타에 2호, 3호 증류소를 지어 확장해나갔다.

신지로의 별명은 '오사카 개코' 였다. 귀신같은 위스키 감별본능 때문에 붙여진 닉네임이다. 그는 야마자키 시골역사 주변에서 집념을 불태웠다. 일본인들이 환호하는 명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주재로 열린 사케 콩쿨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시작이었다. 감각적인 명품을 빚어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미각과 건강을 위한 풍요와 창조에 도전한지 한 세기만에 몰트위스키의 저팬 히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위스키 명가로 세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야마자키 증류소 창고에서 숙성중인 오크통들
▲야마자키 증류소 창고에서 숙성중인 오크통들

제조과정을 둘러보고 '히비키 30년' 과 '야마자키 25년' 을 시음했다. 코를 자극하는 깊은 향기와 색감, 혀끝에 감기는 은은함은 비교불가였다. 도리이 신지로, 게이조 사지, 도리이 신고 등 3대에 걸친 오타쿠 정신의 완성이었다. 증류소 입구에서는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실어온 거대한 보리자루들이 쉴 새 없이 내려지고 있었다.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정원으로 나왔다. 창업자와 고로 두 사람의 동상이 넉넉한 표정으로 증류소를 지키고 있었다. 일본식 붉은 벽돌로 지어진 외벽과 소박한 뜰은 관람객들로 가득한 건물안쪽의 소란함을 차단하고 자연과의 정숙한 대화를 청해오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는 물량이 모자라 소비자들이 아우성이다. 병당 몇 백 만원을 넘어선 가격에도 불구하고 보물 찾듯 마니아들의 유랑이 이어지고 있다. 폭발적인 일본위스키 인기에 물량이 따라가질 못하는 드문 상황이다.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시음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시음

일본 위스키는 산토리 창업자인 도리이 신지로(1879-1962)와 그의 동업자 다케쓰루 마사타카(1894-1979)가 써내려간 역사다. 히로시마 양조장 집 아들인 다케쓰루는 어렸을 때부터 술에 관심이 많았다. 가업을 잇기 위해 술 회사에 취직했지만 그만두고 본고장 스코틀랜드에 건너가 본격적인 위스키 제조과정을 공부했다.

귀국한 다케쓰루는 도리이의 제안으로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침식을 잃고 5년 동안 매진했다. 하지만 첫 출시(1929)된 '시로후다(白札)' 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술에서 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맛도 향도 익숙하지 않은 시대의 예견된 실패였다. 두 사람의 동행은 깨지고 다케쓰루는 독립된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떠났다. 스코틀랜드와 기후가 비슷한 홋카이도에 요이치 증류소를 세우고 각고 끝에 명품 위스키 '닛카(日菓)'를 탄생시켰다.

일본의 양대 위스키 산맥으로 꼽히는 닛카는 독특한 맛과 풍부한 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싱글몰트나 브랜디드 위스키에 일본식 정교한 양조기술이 더해졌다. 산소가 풍부한 요이치의 자연과 어우러진 화사함, 달콤함, 풍미감이 가득 채워진 걸작이다. '니카 프롬 더 발리'는 소프트하면서도 풍부한 과일향과 담백함이 독특하다. 미요스키는 고요한 일본의 자연프로필이 가득 칠해진 그림 같다. 요이치(余市) 그란데 위스키나 미야기코(宮城峽), 타케쓰루(竹鶴), 수퍼닛카 등이 명품의 계보를 잇고 있다.

다케쓰루가 글래스고 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영국인 부인 리타는 아직도 일본열도의 이야기 거리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그의 스토리 '맛상' (NHK 150부작 아침드라마. 2014-2015) 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같은 해 짐 머레이의 '위스키 바이블'은 야마자키 12년을 '올해의 월드 위스키' 로 선정해 분위기를 달궜다. 이후 일본의 위스키는 사재기 붐까지 일면서 제대로 바람을 탔다.

 

▲​​​​​​​명품 '닛카' 위스키. 사무라이 가부토(투구) 덮개가 독특하다
▲명품 '닛카' 위스키. 사무라이 가부토(투구) 덮개가 독특하다

도리이는 야마자키에 남아 일본인이 좋아하는 위스키를 제조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반복된 날들이었다. 출시해서 팔지 못하고 남아있는 주정 시로후다를 10년 동안 숙성시켜 출시한 '가쿠빈(角甁)' 이 드디어 화려한 무대를 열어줬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연구하고 끈질긴 승부 끝에 나온 열매였다. 도리이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얏테미나하레(어디 한번 해봐. 오사카 사투리)" 자세의 성공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 정신이 오버랩 되었다. 위대한 기업가들은 그들만의 교집합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시장은 고급 싱글 몰트위스키 '야마자키(山岐)' 와 '히비키(饗)' 에 열광했다. 중간에 산토리는 독한 위스키에 물을 타서 마시는 하이볼 캠페인(2009)을 시작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꼰대 술로 취급되던 위스키는 이때부터 신세대가 열광하는 모던주의 대명사로 올라섰다. 젊은 한국소비자들까지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위스키의 기록적인 품귀현상 원인이다.

위스키는 원액상태로 10년 이상 숙성시켜야 맛이 난다. 처음에는 금속재질의 발효증류기를 사용하다가 이제는 오크통으로 전환되었다. 한정된 원액으로 한정된 양을 만들 수밖에 없는 생산구조다. 공급부족으로 산토리는 주력상품 '히비키 17년' 의 판매를 중단했다. 100병 한정판매(2020) 한 '야마자키 55년'은 병당 정가 3700만원에 모두 매진되었다. 그 후 홍콩의 한 경매시장에서 한 병이 10 억원에 낙찰되어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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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55년을 출시하는 산토리 경영진
▲야마자키 55년을 출시하는 산토리 경영진

​​​​​​​'히비키 30년' 은 300만원에도 구할 수가 없다. 면세점은 물론 일본 주요도시 주류 판매점에서도 물량이 사라졌다. 이러니 더 사고 싶고, 더 맛보고 싶고, 궁금해서 안달이 날 수밖에 없다. 트랜드와 소비자 심리가 묘하게 버무려진 상황이다. MZ세대 표현대로 돈이 있어도 살수 없는 '레어템'이 된 것이다. 조니워커, 멕켈란, 그렌피딕, 발베니. 이름만 들어도 귀족느낌이었던 본고장의 주인공들이 모두 산토리에 윗자리를 양보했다.

양조기술은 물론 투어코스를 만들고 위스키를 시음하고 현장에서 판매하는 시스템 모두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 배워온 테크닉이다. 거기에 일본적인 독특함과 정성을 담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냈다. 무서운 장인정신이다.

"There are no short cuts. No way to make the years go quicker. 지름길은 없다. 세월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명품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몰트마스터' 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진득하게 적어도 25년의 세월을 견뎌야 탁월한 맛을 낸다. 위스키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잘 빚어진 황금빛 '액체 햇살(버나드 쇼의 위스키 서사)'을 한 모금 머금고 평화로워지면 천상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한 젊은이가 위스키 제조(2020)를 시작해 한국 소비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00년 전 일본의 도리이가 김포의 청년 김창수로 이어지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시작이 반이다. 김포 통진읍에 간판을 내건 '김창수 위스키증류소' 의 주인 김창수(1986년생)의 성공을 기원한다.

"어디 한번 해봐. 얏데미나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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