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홍콩에 살아있는 이소룡의 영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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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홍콩에 살아있는 이소룡의 영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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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어지러웠다. 전선과 부서져 내리는 시멘트 조각들이 얽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으슥함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전란을 피해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소수민(객가족)들이 오밀조밀 모여 살았던 재래식 다층 건물들은 사람이 끼어들 틈새를 허락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을 몇 번이나 오가며 수소문 한 끝에 두 명이 겨우 비켜설 수 있을만한 '미라도 맨션' 계단을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세계적 명성을 간직한 무술 '영춘권' 의 본거지는 거기 작은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손때가 묻은 목인장과 수련도구들이 한쪽 벽에 가지런하다. 도장 옆 다른 공간에서는 아직도 헝겊을 뜯어 붙이는 봉제 미싱이 돌아가고 맞은편에는 종이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홍콩 구룡반도 침사추이 역 앞 깊숙한 골목이다. 대로변은 차량과 사람으로 넘쳐나는데 후미진 모퉁이 안쪽 낡은 건물은 1950대 모습 그대로였다.

홍콩이 자랑하는 웨스트 카우릉 118층 릿츠 칼튼 호텔의 그림자가 닿는 공간이다. 초고층 초현대 밑으로 제국의 전통을 기억하는 페닌슐라 호텔이 있고 그 양쪽에는 명품매장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골목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떠오르는 것들과 사라져가는 것들 사이의 묘한 대조다. 바다건너 홍콩 섬에 네온사인이 켜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처럼 어느새 사방은 갑자기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홍콩 구룡지구의 영춘권 도장에서
홍콩 구룡지구의 영춘권 도장에서

14살 이소룡은 이곳에서 권법을 익혔다. 장년으로 접어든 스승 엽문의 지도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흘렸다. 훗날 주옥같은 영화로 세계시장을 휩쓴 홍콩 붐의 시발점이다. 동물소리를 내며 상대를 압도하는 아트 권법에 매료돼 전 세계에서 수 천 개의 도장이 생겨났다.

목인장(木人樁)과 쌍절봉이 품절되던 시절이 있었다. 수련장 안쪽 벽 '염문국술총회(葉問國術總會)' 가 눈길을 끌었다. 영춘권은 국가적 무술이었다. 그 화려한 추억을 딛고 쿵푸가든(功夫花園)은 또 다른 시간의 담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영춘권은 청나라 말기 임영춘(林永春)이라는 여인이 부친에게 배운 권법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양박주가 복건과 광동일대에 전파했고 황희보나 양찬 같은 당대의 고수들이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영춘권은 보폭이 좁고 세밀하다.

마보자세가 나오려면 가깝게 다가서야 한다. 수평최단거리에서 손가락과 손목으로 상대를 제압하면서 신출한 기교를 뿜어낸다. 당연히 신체급소가 밀집된 중심선을 공격한다. 직권과 고권, 팔꿈치가 치명적 무기다. 100킬로그램 이상의 서양 거구들이 찌르기 한방에 공중으로 떠오른다. 왜소한 동양인들의 자존심이었다.

타격에 앞서 블로킹이나 트래핑 같은 유술은 익히기가 간단하지는 않다. 공수합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내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복잡한 중국권법에 비해 심플함이 매력이다.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서 끝장내는 소념두(小念頭), 다양한 보법을 기본으로 하는 중급 심교(尋橋), 상대의 급소를 공략하고 응용동작을 만들어 내는 3단계 표지(標指) 정도를 익히면 나머지는 자신의 수행이다.

 

영춘권을 익히는 생전의 이소룡
영춘권을 익히는 생전의 이소룡

사람을 가정해서 만든 목인장을 앞에 두고 근거리 연마의 반복이 빚어내는 노력의 결과적 권법이 영춘권이다. 동작 하나에 오천 회 이상의 땀이 베어나야 어느 경지에 오른다. 무릇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이 허공을 휘젓는 손끝에 영혼의 기가 모아져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태권도와 복싱, 펜싱 기술들을 하나로 묶은 풋살로 이어져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축구의 폭풍드리블 테크닉에도 적용되고 있다.

영춘권 대부에게 수련한 이소룡은 1970년대의 별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영화 용쟁호투 개봉을 6일 앞두고 약물부작용에 따른 뇌부종이 그를 앗아갔다. 32살 아까운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후 50여년의 세월을 흘렀다. 이제 영춘 테크닉의 화려한 권법은 뛰어난 스타 전쯔단(見子丹)의 '엽문'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전쯔단(엽문 역)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에 맞서 맨주먹으로 가라데 고수들을 때려눕히는 장면은 수억 중국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기억을 복수의 통쾌함으로 잊고자 했다. 영춘권 화면이 흥행의 보증수표로 통하면서 중국 애국영화 반열에 올라선 이유다.

고교시절 사망유희, 용쟁호투, 당산대형, 정무문에 빠져 한번쯤 쌍절봉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은 까까머리들이 있었을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에 등장하는 싸움꾼 고교스타의 비밀병기는 쌍절봉이었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차별과 사회적 폭력에 맨주먹으로 맞서고 싶었던 시대의 아픔이었다. 깡패들이 동아시아 곳곳을 판치고 다니던 시절의 스토리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강렬한 눈빛, 무수한 고수들을 한방에 때려눕히는 브루스 리(이소룡)는 은막의 연기자를 넘어 살아있는 우상이었다. 리얼 무술, 실전액션, 당당함의 상징이었다.

다시 영화판 최고의 스턴트 맨 전쯔단이 등장하면서 석양녘의 영춘권은 부활의 기운을 이어가고 있다. 간결한 힘, 군더더기 없는 동작, 5미터의 봉을 휘두르면서 악의 무리를 휘젓는 속도감은 비교불가다.

 

영춘권의 스타 영화배우 전쯔단
영춘권의 스타 영화배우 전쯔단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았던 영춘권의 본거지는 이제 천천히 세월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인데도 수련생 몇 명만이 도장에서 기본동작을 익히고 있을 뿐 찬란했던 광동 무술의 족보는 초라한 도장에서 마지막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격투의 현란함과 우상들에 대한 열광이 기억과 망각 속으로 조금씩 잠기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참을 서있었다.

영춘권의 현대적 계보는 엽문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광동어로 '입만'. 베이징어로 '예원'이다. 대륙의 공산당 혁명이 본격화 되면서 그 흙바람을 피해 광동성 불산(佛山)에서 홍콩으로 피신해온 사부는 아들 엽준과 함께 도장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무대를 노크했다. 엽문의 제자들은 새로운 역사의 줄기를 만들어 나갔다. 경극배우 부부가 공연차 샌프란시스코 체류 중에 낳은 아들 '이소룡' 을 만나면서 정점에서 꽃을 피웠다.

영춘권 수련은 자기 자신의 확장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상대도 제압된다. "무형이 돼라. 형태를 잃어라. 물처럼, 물은 컵에 넣으면 물이 되고 병에 넣으면 병이 된다. 주전자에 담으면 주전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물은 흐를 수도 부서질 수도 있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유언에 가까운 이소룡의 이야기다. 노자의 "상선약수(물이 최고의 선이며 도의 길이다)"를 내공으로 다듬어낸 철학적 깊이가 보이는 대목이다.

그 시대 무술은 지금의 격투기나 UFC 가 아니라 생존의 방법이었다. 정상적 존재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모든 두려움, 의심, 밀려드는 인생의 불안감에 정면으로 맞서는 수단으로 영춘권을 익혔다"는 고백은 처연하다.

"나는 내 자신이 한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늘 아래에는 오직 하나의 인류만이 존재한다. 각양각색의 개인이 존재할 뿐이다". 할리우드 진출에 앞서 밝힌 이소룡의 발언이다.

시대는 이제 홍콩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다. 속도에 눌리고 화려함에 가려지는 세상의 이치도 여전하다. 풍요하지만 고독하고 윤택하지만 메마른 내면을 추스르며 살아내는 게 쉽지 않다. 영춘권의 권법은 상대의 주먹을 저지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무수한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우리 마음속의 은장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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