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세한도(歳寒圖)의 길, 추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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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세한도(歳寒圖)의 길, 추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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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제주는 육지와 다른 하늘, 다른 바다였다. 여름 색과 닮았으나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을의 정취도 아니었다. 동일한 푸른색인데 가라앉은 고요함이 베어나는 깊은 색감이었다. 해가 바뀌니 세월이 기울고 마음도 침잠해 더는 전진할 수 없는 바다가 장벽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털어내고 길을 나서 다시 사물을 보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신년 초에 닥친 눈보라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까지 온통 눈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태양이 떠오르면 이내 녹아서 사라질 백색의 허무지만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절정의 기세가 꺾이고 세상은 다시 제주 고유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귀양살이 했던 대정 마을은 차가운 해풍으로 가득했다. 그 세월에도 불었을 바람인데 지금도 여전히 매섭다.

오갈 수 없이 고립된 땅에서 지내는 동안 추사의 텅 빈 가슴에서 터져 나온 서체와 그림들은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있었다. 어떤 절망의 세계에서 건져 올려 진 사유이기에 소중했고 아직도 빛이 나는 까닭일 것이다. 임금을 원망하지도, 세상을 탓하지도 않았다. 초가집 귀양살이 하루하루를 정좌하고 신독하며 지나간 세월과 인연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유배지 초당은 3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울타리 밖의 동상과 비석을 지나니 밖거리(바깥채)가 연결되었다.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친 곳이다. 조선시대 제주 유배자는 200여명이 넘었다. 뱃길로 흑산도를 거쳐 대정현으로 흘러들어오면 일단 나갈 수 없었다. 추사는 8년여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가르치는 일은 세월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추사문하 3천여 선비가 있었다고 하니 그 중에는 제주의 이 학동들도 포함된다. 특출했던 제자 민규호(1836-1866)는 '완당김공소전'을 통해 탐라의 인문학이 추사 때문에 찬란한 기풍을 다졌다고 적고 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서, 제주 대정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서, 제주 대정

안거리(안채)는 대정 주민 강도순의 거처다. 추사는 맞은 편 모거리(별채)에서 기거했다. 초의선사(1789-1866)와 나란히 앉아 차담 하는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살아있었다. 해남 대흥사의 주지스님이었던 초의는 유배기간동안 제주에 6개월을 같이 기거하며 추사를 위로했다. 초의는 30대에 상경해 수종사에서 추사를 알게 되었다. 제주로 가는 귀양길에 대흥사 현판을 써준 것이 더욱 깊은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추사의 초당 지붕은 두툼한 새끼줄에 매달린 돌덩이들이 붙잡고 있었다. 질서정연한 마름모꼴 간격 사이사이로 더러는 새끼줄마저 끓겨 초가지붕 난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화산석으로 둘러쳐진 돗통시(돼지 키우던 화장실)며 물 팡, 물 허벅을 올려놓던 곳들은 원시의 느낌을 소환해냈다. 눌(탈곡 전 곡식이나 탈곡 후 짚 쌓아두는 곳)에 들어 가봤다. 고개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임해야 가능한 공간이다. 고팡(음식 보관창고)은 집주인 강 씨가 쓰던 큰 구들 옆이었다. 대문 곁에 그대로 작은 방처럼 남아있는 쉐막(소외양간)은 애잔한 정취가 물씬하다.

모두가 등을 돌린 세상에도 중국서책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다 주는 제자 이상적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동을 담아 그려준 세한도는 추사관 지하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을 접촉해 책을 구하고 금석문 소감을 적게 해 추사에게 전달했다. 담담한 수묵화 세한도(보물 180호)는 여전히 기품이 넘쳐났다. 안동 김 씨 와의 정쟁에서 탄핵당해 한양에서 가장 먼 제주 유배길에 오른 김정희(당시 55세)가 위리안치(가시 울타리 친 가옥에서 강제기거)의 기막힌 상황 속에서 만들어낸 진본이다. 한 겨울 잣나무와 소나무 아래 글을 읽고 있을 추사의 모습이 연상된다. 세한은 계절의 절기를 빗대어 마음의 추운 겨울 시간을 의미한다. 한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라는 염원도 담겨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보물 180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보물 180호

세한도는 지난 세월동안 여러 명의 손을 거쳤다. 조선말 민영휘 손에 들어온 것을 아들 민영규가 일본인 금석문 연구가 후지츠카에게 팔았다. 식민지의 고단한 세월 속에 이뤄진 일들이다. 조선인 손재형이 후지츠카에게 찾아가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설득(1944년)했고 그도 양심이 있었는지 돈도 받지 않고 돌려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며칠 후 미군공습으로 후지츠카의 대동연구소는 잿더미가 되었다. 추사의 나머지 작품 몇 점도 이때 소실되었다. 손재형이 나중에 돈이 필요해 전당포에 맡긴 것을 간송 미술관에서 구입했고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세한도의 기구한 이력서다.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 진 흘려서

자욱 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시)

추사는 충남 예산 출신(1786)이다. 20세에 첫 부인과 사별하고 24세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 결혼 후 충청도 암행어사, 규장각 대교(순조)를 지낸 뒤 55세에 제주 귀양살이를 거쳐 66세에 다시 북청 유배(예송논쟁)길에 올랐다. 그의 수난은 67세까지 계속되었다. 인생의 폭풍이 지나간 뒤 추사는 과천초당에서 71세에 서거했다. 북청 귀양살이의 억울한 누명은 사후 1년 만에 사면복권(철종)으로 종결되었다. 족손 김익환이 '완당전집(1934.10권 발행)'을 냈고 그로부터 80여년이 흐른 후 제주 추사관이 완공(2010)되었다.

추사의 유품들은 제주의 척박하고 고독한 환경이 준 선물이다. 그는 모든 서체에 능했다. 동양역사상 최고의 문인 소동파에 비유하는 이유다. 음식이 불편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괴로움을 토로한 내용들은 안타깝다. 눈 아프고 귀 아프고 갈 곳도 없는 구구절절한 유배의 괴로움을 썼다. 그런 아내의 부고에 "놀라고 울렁거리며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마음을 붙들어 매려해도 길이 없다" 고 쓴 추사의 마음이 처연하다.

세한도는 풍경화가 아닌 상상의 그림처럼 보였다. 자신의 곁에서 소나무처럼 힘이 되어준 제자를 빗대어 그린 세한의 시간은 건축으로 되살아나 있었다. 수묵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담백하지만 엄숙하게 세한도의 분위기를 담아냈다. 여러 번 돌아보아도 질리지 않는 시간의 창고다. 지하 전시실로 이어지는 계단은 '곡행' 이 사선으로 동시에 연결되었다. 추사의 기막힌 고행과 마음을 밟아보라는 의미의 설계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추사관. 제주 대정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추사관. 제주 대정

추사는 먹을 갈아 워낙 많은 글씨를 썼다. 벼루 열 개가 구멍 나고 붓 천 여 개가 소진될 정도였다. 추운겨울이 지나고서야 송백의 푸르름을 알게 됨은 자연의 섭리에서 꺼내온 인생의 경구였다. 추사는 금석문 연구와 모든 서체를 다 섭렵한 뒤 다시 자신의 필체로 돌아갔다. 마치 인생여정을 다 마치고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철학적 귀환이다.

말과 풍습, 기후마저 낯선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인고의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70년에 걸쳐 본인의 서체를 완성해낸 김정희, 탐라의 맑고 깊은 자연이 '추사체' 라는 보물의 정수를 낳게 했다. 유배의 고독과 고통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감자창고 같은 '추사관'을 보고 실망했다는 반응도 많았다. 설계자 승효상의 답변이다. "건축은 시대를 증언하고 장소를 증언한다. 땅이 갖는 터무니를 새로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유배는 절망의 의미다. 그 땅에서 추사가 희망을 놓지 않고 신독정진한 스토리가 터무니에 깊게 새겨진 것이다.

추사는 토종 수선화를 좋아했다. 흰 꽃받침에 금색 잔이 올려진듯해서 '금잔옥대' 라고도 부른다. 유배지근처 사방에서 솟아나는 수선화는 다양한 수묵화의 배경이 되었다. 제주사람들은 수선화를 '몰마농(말이 먹는 마늘. 제주방언)' 이라 해서 뽑아내 버린다. 이를 보고 추사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나면 이렇게 괄시를 받는구나" 라며 한탄했다. 엄동의 끝은 아직 먼데 질서를 잃어버린 계절은 벌써 추사가 사랑했던 수선화를 돌담 사이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겨울의 절망이 봄의 희망으로 비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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