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방태산의 보석 살둔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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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방태산의 보석 살둔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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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나는 강원도가 그리웠다. 가을이 오는 길목의 산들과 계곡의 바위들이 궁금했다. 색(色)으로 표현되었다가 다시 공(空)으로 회귀하는 원시의 풍경들이 허기처럼 밀려왔다. 이정도 증세에 이르면 떠나는 수밖에 없다. "걷는 자의 발끝에서 모든 것이 시작 된다"는 괴테의 말을 품고 짐을 챙겼다. 여름의 추억에 밀리고 가을의 향수에 이끌려가는 시간이다.

홍천을 지나 인제에서 국도로 접어든 방태산 자락은 위엄을 갖춘 신사의 품격 그 모습이었다. 주변으로 4개의 자매 봉우리를 아우르는 자태가 의젓하고 믿음직하다. 내린 천 하류에서 길은 구부러진 선들로 연속되었다. 개천을 따라 오르고, 휘어지고, 내려가고, 건너가는 수행의 반복이다. '내린천' 은 오랜 세월 이 고장의 생명수였다. 맑은 물줄기는 청정을 지향하는 주체자의 에너지였다.

비바람이 수없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느 덧 평화가 찾아와 있었다. 아직은 푸른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바다의 윤슬 같은 반짝임이 숲 쪽으로 나의 시선을 계속 붙들었다. 엷어진 햇살이 세월에 지친 생명들을 지배하는 중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넉넉함이 주머니에 가득해졌다.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중의 공기는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물려서 질릴 때까지 마시고 내뿜고 급기야는 양팔을 벌려 폐부에까지 직접 관통시키며 산과 진한 포옹을 나눴다. 오후의 햇빛이 지나는 시냇가 산길은 한 계절을 보내는 허무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미국 여류시인)의 시어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너무 살며시 사라져 배신 같지도 않았네.

고요가 증류되어 떨어졌네.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처럼,

아니면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들판처럼, 땅거미는 조금 더 일찍 내렸고,

낯선 아침은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햇빛을 내밀었네.

그리하여 새처럼 혹은 배처럼,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빛을, 미의 세계로 도피 시켰다네"
 

▲방태산 봉우리들의 모습
▲방태산 봉우리들의 모습

일곱 자락으로 겹쳐지는 봉우리들 중 선명하게 드러난 세 번째, 그 너머 산들은 회색으로 엷어지더니 마지막에는 시야의 끝에서 보라색 실루엣으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하늘빛에 섞여 무한으로 멀어져 갔다. 그 희미한 흔적들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원근이다.

방태산(1435미터)은 인제군 인제읍과 상남면에 걸쳐 있다. 깃대봉과 구룡덕봉이 능선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넘어오는 길과 조우하고 인제읍과 반대쪽으로 나가면 한국의 10대 골프장으로 유명한 '세이지우드' 와 만난다. 산의 모양은 주걱처럼 생겼다. 그래서 '주억봉' 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산 주변은 '삼둔 사가리' 로 부른다. 남쪽 내린 천 부근의 살둔과 월둔, 달둔, 산 북쪽의 아침가리, 결가리, 적가리, 연가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식민지 수탈과 한국전쟁, 이념대립에 지쳐 정처 없이 떠돌던 사람들이 왜 이곳에 터를 잡고 운명의 짐을 내려놨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산골마을의 백미는 '살둔산장' 이었다. 백제 스타일의 고건축 양식에 귀틀집 형태를 안고 사찰분위기까지 담았다. 넉넉한 단층 지붕을 뚫고 정자처럼 솟아오른 2층의 모습은 매우 독특했다. 통나무를 깎아 맞춰나간 뼈대와 이어 붙여진 벽채들이 전형적인 우리 건축이다. 세월 따라 주인 따라 조금씩 다듬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오래전 한국의 100대 살고 싶은 집(1985년 건축)으로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때는 번성했던 산골마을에 이제 몇 가구만 남아 동화처럼 계곡을 지키고 있었다. 텃밭에는 고랭지 배추와 무가 가지런히 자라나 임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개천가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수호신처럼 왕성한 자태로 도열해 있었다. 흘러가는 물소리에 리듬을 태우거나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 산장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듯도 하다.
 

▲살둔 산장의 가을맞이
▲살둔 산장의 가을맞이

 

출렁거렸던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득한 꿈결속의 메아리 같았다.1400미터 네 개의 산봉우리 안쪽으로 자리한 살둔 분지는 1억년의 풍화가 빚어낸 걸작이었다. 처음에는 속세를 등진 화전민들이 만들고 계속해서 후세사람들이 소박하게 일궈냈다.

70년 동안 유지되었던 생둔 분교 교실에는 흐릿해진 '급훈' 액자가 힘겹게 걸려 있었다. '착한 어린이가 되자'. 어린 시절 나에게도 익숙했던 낡은 붓글씨는 스러져가는 벽과 함께 동고동락중이다. 잠깐씩 캠핑으로 다녀가며 던져놓은 도시사람들의 인기척들만 잡초 마당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알 수 없는 시간부터 불리어져온 이름들 모두가 정겨웠다. 생둔, 미산, 신남, 물안골, 서곡리, 철정, 내촌, 용소, 아홉사리로, 두촌, 군유동, 산삼골, 황병로, 광석리. 너와집이며 호박넝쿨 옆 은행나무며 들국화 노랗게 물든 등성이, 밭두렁 마을마다 민초들이 호명하고 살았던 고을들의 자태는 하늘같았다.

길은 사라질 듯 숲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한다는 것과의 대결이다. 산장까지의 길은 구겨진 넥타이처럼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살만한 둔덕(살둔)'을 찾아낸 옛 화전민들의 처음 표정이 궁금해졌다. 사방이 고산준봉들로 장식된 넉넉한 분지는 완벽하게 신이 내린 영지였다. 하강하는 산줄기와 흐르는 물이 만난 생명의 연분이었다.
 

▲겨울 산 눈 덮인 모습이 좋아 이곳에 눌러앉은 산장지기 장 씨와 함께
▲겨울 산 눈 덮인 모습이 좋아 이곳에 눌러앉은 산장지기 장 씨와 함께

새벽 물소리에 깨어나 툇마루 한지 쪽문을 밀어보니 산중의 아침공기는 차가웠다. 밀려드는 새로운 기세가 밤새 점령했던 방안의 공기를 몰아내는 느낌이 좋았다. 밖으로 나서니 들꽃들이 흐드러져 있다. 무성한 젊음이 지나간 자리에 차오르는 허무함처럼 꽃들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걷고 또 걸었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아침을 맞아 뚜렷한 윤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상원사와 월정사에서 넘어오는 길은 방태산 능선에서 만나 첫 햇살과의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개천가에는 소나무가 무성했다. 곧게 올라간 몇 그루보다 가지와 줄기가 서로 엇갈리며 사선의 비약을 도모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직선보다 휘어진 곡선이 어우러져 정들어가는 산중 인심의 속마음인 듯하다. 물가에는 돌탑들이 몇 개, 못다 한 인연의 아쉬움을 쌓아놓고 떠난 마음들만 가득히 남아있었다.

구불구불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다. 어둠을 이겨낸 해는 물가 저쪽으로 떠오르고 낮 동안 지친 저녁 해는 물가 이쪽으로 질 것이다. 침묵도 비껴간 계곡에는 여름 폭풍우에 세월을 안은 돌덩이들만 남겨져 가을을 맞고 있었다. 이렇게 가고 오는 인연의 길목에서 남고 남겨지는 운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물안개가 방태산 중턱까지 올라가다가 그림처럼 걸터앉았다. 별일 없이 하루가 찾아왔다. 고요와 적막으로 버무려진 담담함이다.
 

▲방태산 자락에 걸린 아침 물안개 한 자락
▲방태산 자락에 걸린 아침 물안개 한 자락

가을꽃은 봄꽃보다 처연하다. 화려함보다는 무겁고 색이 진하다. 다가올 추위를 앞둔 탓인지 아니면 봄꽃에 각인된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짠하다. 짧은 만개 후 차가워지는 대지에서 다음 생을 기약해야하는 애잔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화려한 색의 계절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높고 선명한 구름의 이동이 눈에 잡힌다.

"생명의 탄생은 저 하늘의 구름 한 자락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저 하늘의 구름 한 자락이 스러지는 것이다.

구름은 본래 정처가 없었으니

사는 것과 죽는 것도 이와 같도다". -서산대사.

가을해는 짧다. 그래서 덧없다. 머지않아 골짜기에 눈이 내리고 산간 마을의 길들은 사라질 것이다. 무성한 날 맺었던 인연들도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고향이 없는 구름처럼, 정처 없이 흐르는 물처럼. 아무도 묻지 않고 그냥 온 산은 은빛 세계로 변할 것이다.

결국 생각의 영역이다. "네 마음속에 사원이 있다" 는 라마불교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시간의 허상을 움켜쥐고 살아간다. 순간을 주머니에 넣고 영원할 것처럼 공간을 유영한다. 태초의 '무'를 생각하면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념인데도 말이다.

신에게는 1억 년 전도 '지금'

'지금' 도 '지금'

1억년 후도 '지금' 이다.

그 시간이 방태산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구도 피해갈수 없어 절대적이고 공평한 시간. 시간은 빅뱅이후 시공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우주는 영원하다. 시공을 초월해 있다. 이 화두 앞에 수많은 철학과 종교가 명멸했고 인간의 사유가 물결을 이뤘다. 답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주변이 조용해지면 나는 다시 내가 지나왔던 순간들과 내 곁을 떠나간 생명들을 생각한다. 유독성의 어렴풋한 계절성 우울증이다. 그것들은 희미한 구름처럼 내 주변을 맴돌다가 마침내 나를 집어 삼킨다. 조금씩 짓눌리다가 슬픔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소리를 채집하고 귀에 담으면서 평온을 찾는다. 낯선 곳에서 이파리들이 단풍 색을 만드는 소리, 뒤늦게 오솔길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다람쥐 소리, 마지막 더위에 꽃가루를 날려 보내는 꽃들의 소리, 오래된 언덕을 건너가는 오후의 바람소리들까지.

방태산으로 해가 넘어가면서부터 '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고독하거나 우울해지면 습관처럼 들으며 멍 때리기 하는 곡이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총통에게 카탈루냐가 유린당하고 있을 무렵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는 고향을 떠났다. 망명지에서 고향의 정취를 그리워하며 만든 곡이다. 첼로의 우울하고 묵직한 선율은 가라앉은 의식의 중앙선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이어지는 테너의 목소리가 구슬프다. 푸시킨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러시아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이다.

"오. 어디로,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내 젊음의 황금 같은 날들이여

다가오는 내일은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던가.

헛되이 그것을 바라볼 뿐

모든 것이 어둠속에 가려져 있구나.

그러나 상관없는 일

운명이 가는 길은 항상 옳은 것이다.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어도

모든 것은 예정된 시간에 따라 움직이거늘".

거시적 복잡성과 미시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속세로 돌아갈 시간이다. 산중의 기운이 온몸에 골고루 스며들어 그나마 안심이다. 비개면 나타났다가 해지면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담담한 일상을 꿈꾸며 나는 느린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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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 2023-10-20 07:09:15
방태산의 살둔산장~~
꼭 가봐야겠네요~~

머릿속에 그려지는 수려한 산하보다도~
더 수려한 글솜씨에 취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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