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아프리카의 대표와인 스텔렌보쉬 피노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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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아프리카의 대표와인 스텔렌보쉬 피노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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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과 대서양의 접점은 해안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봉으로 모아졌다가 다시 동서 대양의 운명적 거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식민지 역사이후 가장 세련된 도시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동쪽의 무성한 와인산지 스텔렌보쉬는 아프리카 대륙의 끝을 묵묵하게 지키고 있었다. 버려진 땅이 '신의 물방울' 이라는 포도주로 역사에 새겨진 것은 16세기 이후였다.

초기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시대 아프리칸스로 시작했다가 보어전쟁이후 영국 지배로 지금의 풍광을 간직한 스텔렌보쉬는 광대한 구릉에 펼쳐진 포도밭 만큼이나 기나긴 역사를 안고 있다. 이곳의 와인은 유럽인들이 말하는 신대륙 역사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을 견디어 왔다. 신세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와인대신 우아하고 깊은 맛을 가진 유럽의 와인 맛을 추구했다.

16세기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바타미야(자카르다)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필요했지만 머나먼 항해 길은 늘 위험한 도박이었다. 성공적인 뱃길을 위해 남아공 케이프타운은 절대 필요한 중간기착지였다. 장기항해로 지친 선원들에게 부족한 비타민을 제공해주는 신의 처방이 와인이었다. 유럽에서 동남아까지 평균 10개월이 걸리는 시간동안 와인은 식품이 아니라 최고의 의약품이었던 셈이다. 스텔렌보쉬 일대의 기후와 습도, 지형에 알맞은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기막힌 선택이었다.

▲어니엘스 와이너리. 퍼팅그린이 갖춰진 모습
▲어니엘스 와이너리. 퍼팅그린이 갖춰진 모습

스텔렌보쉬는 케이프타운 측면 에르스티 강둑 주변에 만들어진 인구 17만의 작은 도시다. 규모가 비슷한 우리나라 파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난해 유럽인들이 꿈꾸는 휴양지다. 토양과 기후가 동유럽과 비슷한 것은 우연인 듯 필연이었다. 1679년 네덜란드 식민지 총독 시몬느 반 델 스텔(Simon van del stel)이 최초 개척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스텔렌보쉬(Stellenbosch)' 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로만 카톨릭의 박해로 추방당해 신천지를 찾아 나선 위그교도들이 이 계곡 기름진 땅들을 골라 포도를 심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농부들의 땀이 더해지는 세월 속에 지금의 와이단지로 모습을 바꿨다. 모래가 많은 충적토는 와인생산의 최고 조건이었다. 적당히 섞인 화강암도 포도재배에는 탁월한 환경이 되어주었다.

스텔렌보쉬의 푸른 계곡은 눈으로 그 끝을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광활했다. 이 골짜기에서 남아공 와인의 30퍼센트가 생산된다니 경이롭다. 내륙으로 이어진 와이너리의 푸른 밭 줄기들은 시야에서 흐린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지점까지 정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의 스텔렌보쉬는 세계인들의 관심지역이다. 필요에 의해 험난한 환경을 일구고 문명의 세계로 탈바꿈시킨 대항해 시대 사람들의 위대한 선택은 아직도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랑스의 부르고뉴와 보르도 품종은 물론이고 수십만 그루의 참나무 단지에서 만들어지는 오크통은 스텔렌보쉬의 자랑이다. 4백 년 전부터 수업을 이어온 스텔렌보쉬 대학은 와인을 연구하고 맛있게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의 산실이다. 아프리카 유일의 와인학 코스가 개설되어 다른 대륙의 학생들이 지원행렬을 계속되고 있다. 시내 도프 스트리트의 모더커크 교회 박물관은 와인과 자동차들이 채워져 매우 흥미 있는 공간 이었다.

▲스텔렌보쉬 프렌치후크거리. 최초의 백인 거주지
▲스텔렌보쉬 프렌치후크거리. 최초의 백인 거주지

스텔렌보쉬 대학의 종교학 석사과정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대를 이어 공부해온 코스다. 유럽의 유학생들 속에 섞여 한국 목회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 대학의 합창단 '방바예투(우리아버지라는 의미)' 는 아프리칸스(스와힐리어)로 월드공연을 통해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주기도문을 아프리카 언어로 합창하는 화면은 스텔렌보쉬 와인과 어울려 경외감이 들게 한다. 이미 거쳐 온 남아공의 아름다운 도시 포토 엘리자베스와 더반을 잇는 '가든 루트' 의 수려한 경관이 산맥을 따라 이곳까지 연장된 모습이다.

스텔렌보쉬 와인너리는 두 가지 품종을 오래 재배해왔다. 화이트 와인 슈넹 블랑은 프랑스 루아르벨리 포도품종을 그대로 옮겨 산도가 풍부하고 다양한 토양의 풍미가 섞인 양조의 향취가 물씬하다. 또 하나는 남아공 토착 품종 '피노타지' . 우리가 좋아하는 피노누아에 생소(프랑스 남부 적포도 품종)를 이종 교배시켜 얻은 레드와인 이다. 1925년부터 생산되어 대 성공을 거뒀다. 이미 100년의 역사를 지녔으니 유럽인들이 더 이상 신세계와인이라고 낮춰 볼 수 없는 정도의 깊이와 품격을 다 갖췄다.

케이프타운은 오래전부터 아프리카가 아니라 세련된 유럽의 도시였다. 40% 이상이 백인 주민이다. 아파르트 헤이트(인종차별) 시대에도 이곳은 무풍지대였다. 점차 와인 수요가 늘고 소비가 증가하면서 일대는 자연스럽게 와인명소가 되었다. 스텔렌보쉬와 프렌치 후크, , 서머셋, 웰링톤 등 5개 지역이 웨스턴 케이프의 와인 랜드를 형성했다. 이제는 아프리카와 남아공 관광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 골퍼 어니엘스의 와이너리를 비롯해 160여개 농장에서 수확되는 와인들은 수준급이다. 미어루스트, 루첸베르그, 텔레마앤워릭, 보쉔달 등 베스트 명품들이 수두룩하다. 한때는 백인농장주와 값싼 흑인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도 심했지만 다 지난 이야기다. 스텔렌보쉬 출신 흑인 와인 전문가들이 유럽을 누비고 있다.

▲스텔렌보쉬 와이너리는 유럽보다 광활하고 이국적이다.
▲스텔렌보쉬 와이너리는 유럽보다 광활하고 이국적이다.

거친 풍우와 변화무쌍한 기후가 교차하는 해안가에서는 스와트랜드(쉬라즈)와 달링(쇼비뇽 블랑), 타이거 버그(메를로), 스텔렌(카베르네 쇼비뇽에 피노타주를 섞은 품종) 등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세계시장에 이름이 알려진 품종들이다. 남아공 와인은 인도 등 서남아시아와 싱가포르 시장까지만 진출하고 동아시아 마켓은 최근 들어 일부 제품이 소개되고 있을 정도다.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스텔렌보쉬 와인을 우리만 모르고 지내왔던 것 같다.

제임스 쿡(1728-1779) 선장이 호주를 발견할 당시 타고 갔던 원정선박과 석탄운반선 인데버호를 비롯해 레볼루션호, 디스커버리호 등 수많은 대항해 시대의 신대륙 탐험선들이 이곳 스텔렌 보쉬에서 포도주를 공급받으며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소금에 절인 양배추로 괴혈병을 이겨내고 스텔렌 보쉬 와인으로 비타민을 보충하면서 그들은 생명을 이어나갔다.

아프리카 요리 야마초바(타조와 산양 등의 꼬치구이) 안주에 종류별로 마신 시음 와인은 대낮부터 홍시처럼 내 얼굴을 벌겋게 달궜다. 술이 약한 내가 3잔이나 연거푸 마시다니 이미 혼수상태다. 태양과 바람과 아프리카 정취에 잠겨 나의 영혼은 조심스럽게 스텔렌보쉬 계곡을 향해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헤밍웨이의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와인이다"라는 말을 믿고 연거푸 목에 넘긴 결단이 화근이었다. 와인을 마시면 이성이 떠나가고 영혼이 나온다는데 오후 시간 내내 프랑스 도미니크 교회의 돔 뻬리뇽 수도사처럼 대낮에 별을 보는 기분이었다. 좋은 와인은 비싼 와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서 마시는 와인이라는 태도로 대들었던 것이 애초부터 무리였다.

스텔렌보쉬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하나로 묶어주는 문명의 등대로 역사에 남았다. 인간이 미지의 땅을 찾아내고 인종끼리 숱한 갈등 끝에 서로를 이해하며 그래도 지금처럼 살만한 공동체를 만들어 병존하는 놀라움은 시간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와인은 인류역사를 찬란한 무늬로 채색해낸 아름다운 도구였다. 대륙과 인간을 이어준 인연의 끝에는 와인이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빅토로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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