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타지마할, 무굴제국의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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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타지마할, 무굴제국의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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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은 건축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가 인간에게 선물로 내려준 조각 작품 같았다. 사람이 만들 수 없기에 속세의 영역을 벗어난 전설이라고나 할까. 건축의 세계에서 설명하기 힘든 위대하고 정교한 타지마할을 첫 대면한 봄날 오후는 오래 기억에 남는 아스라한 충격이었다. 이 우유 빛 '예술명품' 은 시야를 혼미하게 흔들어댔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쉬지 않고 장시간 달려온 피로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끔 도로를 가로막는 소떼와 먼지로 뒤덮인 혼란한 시골 동네를 관통해야 하는 고생쯤은 타지마할 앞에서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좌우 대칭을 맞춘 기막힌 배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로움이 시선을 압도했다. 당대의 보물, 자금, 미술, 공예의 집대성이다.

웅장한 돔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순간 어떤 경외감이 나를 감쌌다. 세계가 인정하는 화려한 무덤은 500년 세월을 견디며 다시 시간을 거스르고 있었다. 지구촌 7대 불가사의라거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타지마할 전경,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전경, 인도 아그라

인도는 거대한 땅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족과 부족이 명멸했다. 몽골제국의 후손 티무르가 영향을 미쳤던 시기 이슬람 세력들은 인도 대륙 곳곳에 술탄왕국들을 세웠다. 무굴제국은 이들을 제압하고 통일했던 왕조다. 타지마할의 주인공 샤 자한(제위기간 1628-1657)은 무굴의 5대 황제였다. 동서로 맹위를 떨쳤던 그는 제위 중에 험난한 인도 중북부 데칸고원까지 원정을 떠났다. 용맹하고 거침없는 당대 최고의 통치자였다.

이 때 동행했던 부인 뭄타즈 마할이 제국의 수도 아그라로 돌아와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무굴 황제들은 제국의 통치수단으로 여러 부족 출신의 여인들과 결혼했다. 황제의 3번째 왕비 뭄타즈 마할은 후세 사람들에게 '애비(愛妃)' 로 회자 될 만큼 극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타지마할은 그녀를 못 잊어 만든 화려한 무덤이다. 황제는 살아생전 연애하면서 자주 가던 곳에 그녀의 사후무덤궁전을 지었다. 대공사에는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 터키, 중동 등 세계 곳곳에서 동시대의 기술자와 건축가 2만 명이 동원되었다. 16세기 강성했던 왕조가 우여곡절 끝에 이 지역을 장악했고 왕가의 지극한 사랑이 동화 같은 현실로 남겨진 현장이다.

샤 자한은 아버지 아크바르에게 반란을 일으켜 즉위했다. 폭력의 끝은 길지 않았다. 그는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형제까지 모두 죽이고 이뤄진 비극이었다. 3대가 혈육 간 참극으로 권력의 주인공이 바뀌는 혼돈의 시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이성적 쟁탈의 대상이다. 아들에게 쫓겨난 샤 자한은 타지마할 건너편 아그라 성채(Agra Fort)에 갇혀 죽을 때까지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죄수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그는 자무나 강변 탑에서 생을 마쳤다. 통곡과 이어지는 슬픔에 계절이 바뀌기를 몇 차례. 먹기마저 거부한 비통함 때문에 샤 자한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 버렸다. 인간의 잔인함과 비정함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여생의 작은 위안은 사랑했던 아내의 무덤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샤 자한이 갇혀있던 아그라 요새 무산만 버즈 탑에 서면 저 멀리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인다. 다행이 사망이후 시체는 아내의 석관 옆에 나란히 묻혀 졌다.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얀 궁전무덤은 실은 왕실의 비극을 담고 있는 곳이다.

▲타지마할 전경,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본관 정원의 모습

타지마할은 300미터 수로가 연결된 앞쪽 정원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진입통로는 물과 평행으로 이어져 있다. 정원의 질서정연한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을 담아내는 의미로 만들어진 구성이다. 언제나 태양과 하늘을 대칭으로 담아내고 있다.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진 본관건물은 인도분위기가 가득했다.

아치형 통로 공간을 지나 타지마할 중앙 돔을 올려다봤다. 22년의 공사 끝에 78미터 높이로 완성된 신비로운 팔각 건물이다. 이후 다시는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없도록 기술자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중앙 돔은 4개의 작은 돔이 사방에서 감싸 안고 있었다.

동서남북에 세워진 50미터 높이의 작은 돔, 미나레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숨 막히는 대칭구조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만든 아부다비 그랜드 모스크의 웅장한 미나레트 보다 더 정교하고 예술감이 뛰어났다. 미나레트 발코니는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 최고 권위다. 사방에 포진한 작은 돔 때문에 중앙돔이 더욱 권위적이고 완벽하게 보였다.

내부의 벽마다 장식된 꽃 같은 무늬는 이슬람 경전의 대목들이다. 코란에서 발췌한 문장들은 마치 휘갈겨 쓴 우리의 붓글씨 같았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오면 뭄타즈와 샤 자한 부부가 부활 할 것이라는 예언적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거대한 대리석에 상감기법(돌에 파놓은 문양이나 글씨에 보석을 새겨 만드는 형식)으로 장식된 경전과 연꽃문양들은 격조 높은 미학의 세계였다. 청옥, 루비, 진주, 산호 등 42종의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본관의 이슬람 디자인 공간으로 보이는 타지마할
▲본관의 이슬람 디자인 아치공간으로 보이는 타지마할

건축당시 사용된 엄청난 대리석들은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자이푸르에서 운반했다. 매일 2만여 명이 동원된 이 공사로 벌판이었던 분지는 '타지간지' 라는 이름의 신도시로 불려 졌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대규모 공사와 천문학적 비용은 그저 상상에나 맡겨야 할 것 같다.

흰 대리석은 낮 시간에 보석장식의 빛을 반사해 천연칼라가 살아나고 밤에는 달빛이 반사되어 분홍색을 띈다. 보름날 야간 관람이 가장 기막힌 이유다. 아프가니스탄 사파이어와 중국의 수정, 티벳의 터키석 등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최고의 천연석이 사용되었다. 벽면 상감기법은 틈새하나 허용하지 않는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 라는 모자이크로 완성되어 긴 세월에도 흠집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르네상스의 유럽건축 기법이 무굴제국까지 건너온 것이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입구 타원형의 아랍식 공간 너머로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영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중앙 돔의 금장식이 뜯겨져 사라졌고 입구의 은제 문짝도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물질을 넘어서는 영혼의 사랑만은 장구한 세대를 지나면서도 변치 않고 생생한 이야기로 현세를 사로잡고 있었다. 타지마할은 석양 속으로 점점 긴 그림자를 만들며 조금씩 엷어져 갔다.

아그라와 델리 일정을 마치고 뭄바이로 돌아와서도 이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식민지 때 번성했던 타지마할 호텔근처 가게에 들러 피에트라 듀라 양식의 화강암 접시를 구했다. 둘레는 자스민과 연꽃, 나팔꽃 문양들이 화려하고 중앙에는 씩씩한 인도 아기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아직도 샤 자한의 사랑이야기가 전 세계로 팔려 나가고 있는 셈이다.

사랑은 이처럼 위대하다.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넘는다. 본래 인간은 고독하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다. 그 사이 사랑과 우정이라는 작은 관계가 모든 인간을 끝까지 버티고 서있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과거는 흥미롭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의미와 기억으로 가득해진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표현대로 "인간의 생김새는 모두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다". 사랑이 최고의 선으로 인류역사에 남아있는 인도 아그라는 그래서 정겹다. 타지마할은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애틋한 사랑의 말을 쉬지 않고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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