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시선] '박태보전'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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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시선] '박태보전'을 읽으면서
  • 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3년 02월 08일 16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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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태보전'을 읽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모진 친국 끝에 목숨을 잃은 올곧은 선비의 전기입니다.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숙종(1661~1720)이 기사환국(己巳換局) 후 인현왕후를 내칠 때 벼슬 자리에서 물러난 신분인데도 뜻을 함께하는 선비 80여 명을 대표해 상소문을 썼습니다.  그 내용에 불같이 노한 숙종은 밤중에 잡아들여 꿇은 무릎에 돌을 얹어 고문하거나 불로 지지는 압슬형(壓膝刑) 낙형(烙刑) 등을 가하면서 왕을 능멸한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밤을 새운 고문으로 살이 타는 누린내가 진동하고 유혈이 낭자한 채 뼈가 다 드러나 그 처참함에 나장(羅將)들까지 울면서 매를 치는데도 정재는 자신의 옳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친국과 참혹한 고문을 당한 인물로는 단종을 몰아낸 세조 때의 성삼문 등 사육신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 등이 꼽히지만, 고문 시간과 종류에서 정재를 능가할 사례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거나 엄살은커녕 신음과 비명도 내지 않자 숙종은 더욱 길길이 뛰며 "이 독한 물건을 죽이고 말겠다.", "전부터 널 죽이려 했다"고 합니다. 숙종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다가 정재의 상소로 몇 번 체면이 깎인 일이 있습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성질 잘 내고 스스로 화병 증세로 괴롭다고 했던 숙종은 당시 혈기가 승한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박태보전'에 나타난 숙종의 행동과 고문은 하도 세밀하고 핍진해서 읽으며 기가 질릴 정도입니다. 왕이 "박태보의 이런 말은 쓰지 말라"고 한 말까지 다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고문을 한 뒤 숙종은 진도로 위리안치형을 내리는데, 정재는 겨우 노량진까지 갔을 때 고문 열흘 만에 숨지고 맙니다.

내가 읽은 '박태보전'은 반남 박씨 집안의 4대 후손 박상로(朴相老, 1732~1776)가 쓴 것으로 비정되는 한글 작품 '문녈공 긔사'(文烈公紀事라는 뜻)를 현대어로 풀이한 글입니다. 박상로는 영조 때 사헌부 대사헌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정재에 대해서는 한문이나 한글 전기와 소설이 30여 종이나 나왔는데, '문녈공 긔사'는 그중 내용이 가장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재는 반듯한 명문가 자손입니다. 아버지는 이론과 실용을 아우르는 독창적 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입니다. 명나라만 죽어라 섬기는 것에 반대하고 주자학일변도인 세상에서 새로운 해석을 도모하며 노자에 관한 책과 농사 서적도 지었습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과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24)은 정재의 생모와 양모의 오라버니, 그러니까 외숙입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원급제한 정재는 글씨 잘쓰고 얼굴도 잘생겨 그에게 반한 여인이 정재를 따라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 태유(泰維, 1648~1686)는 바른 말로 상소를 자주 하다가 귀양간 끝에 숨진 강직한 성품으로, 우리 서예사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박세당의 초상화(왼쪽). 2남 태보가 주선해 조세걸이 그렸으나 정작 아들은 그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른쪽은 박태보의 글씨. 윗부분에 이름이 보인다. 
박세당의 초상화(왼쪽). 2남 태보가 주선해 조세걸이 그렸으나 정작 아들은 그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른쪽은 박태보의 글씨. 윗부분에 이름이 보인다. 

세 아들 중 큰아들에 이어 3년 만에 작은아들까지 잃은 서계의 상심이 오죽했겠습니까? 스스로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죽을지언정 더러운 것에 맞춰 살지 않겠다"고 다짐(서계의 자찬 묘표)한 선비이지만, 지나치게 올곧고 강직한 두 아들을 늘 걱정하며 살아온 아버지였습니다. 두 번의 참척을 당한 뒤에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을 후회했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찾아가 "이제 어쩌겠느냐? 조용히 돌아가거라"라고 한 데 대해 아들은 "조용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렇게 작별하고 나와서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아버지-한국사의 인상깊은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정재는 귀양을 떠날 때 요행히 살아서 유배지에 도착할지 모른다며 모시는 사람에게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챙겨달라 했지만, 아버지는 쓸모없는 줄 알고 그러지 말라 했습니다. 그해의 섣달 그믐날, 서계가 읊은 시 세 수 중 마지막은 이러합니다. "한 해가 지나도록 아무 의욕이 없고/하루가 다하도록 기쁜 게 없구나/자식이 죽으면 그래도 아비가 묻는다만/아비 늙으면 다시 누가 보살피랴."[竟歲獨無趣 終朝常少歡 兒亡猶父瘞 翁老更誰看] 

서계의 집안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우암도 제주 유배지에서 다른 곳으로 압송돼 오던 중에 박태보가 죽은 사실을 전해듣고, "대단하다. 대단해. 그 덕분에 인륜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됐다."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도 한 달도 안 돼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인조 효종 현종 등 세 왕을 거친 조선의 거물 정치인 우암도 숙종은 거침없이 죽여 버립니다. 

그로부터 5년 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장희빈을 내치면서 사람이 달라진 듯 박태보를 죽인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이조판서로 추증하는 한편 그 부인에게 정부인(貞夫人) 직첩과 월름(月廩, 월급으로 주는 곡식)을 내려줍니다. 그해 제사 때에는 제문을 보내 "내가 허물을 생각하며/뉘우치고 슬퍼하는도다./이따금 지난 일을 생각하면/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는도다./…내 뉘우침을 어느 때에 잊으리오.…착한 신령은 아시거든/ 이 술 한잔을 흠향하라"며 애도합니다. 정재는 숙종 다음 경종 때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데, 그다음 임금 영조는 시호에 충(忠)을 넣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박태보는 정말 충신이다"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영조는 압슬형 낙형을 없앤 임금이기도 합니다. 

박태보 부자의 일을 읽으면서 옳은 것을 올곧게 지켜가는 아름다움과, 세상을 강직하게 살아가는 어려움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여당과 야당이 원수가 되어 매일같이 헐뜯고 싸우고,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온갖 비루하고 누추한 밑천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귀기울여 듣고 눈 돌려 읽고 싶은 뉴스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맑고 곧고 한결같은 인격이 더욱 소중하고 아쉽고 그립습니다.

이 글은 자유칼럼 (2023.2.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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