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시코쿠 순례길, 오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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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시코쿠 순례길, 오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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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는 이세상의 전부다. 하늘은 우주에, 바다는 땅에 경계 없이 계속 된다. 무한으로 뻗어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공해(空海)다. 승려 구카이(空海)의 이름은 그래서 더욱 심오하다. 일본인들은 그를 홍법대사(弘法大師. 고보다이시. 774-835)로 높여 부르며 오랜 세월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구카이는 7세기에 당나라 견당사로 다녀와 최고도시 장안(長安)의 불교를 가져다가 일본 토속 주술과 접목시켜 신곤슈(진언종.眞言宗)를 창시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어의 알파벳인 히라가나를 만들고 일본서도(書道)를 처음 열었다. 귀족불교를 서민들이 좋아하는 밀교(密敎)로 확산시켰다. 석가모니에 버금가는 일본불도의 중시조로 여길 만 하다. 혼슈 오카야마에서 입적한 후 다이고 천황으로부터 홍법대사 익호(921)를 받았다. 역사상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경외하는 인물이다.
 
구카이는 시코쿠에서 수련했다. 방황하던 시절 어느 날 만난 노승려에게서 허공장구문지법을 들었다. 백만 번 외우면 모든 가르침의 참뜻을 알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출가를 결심했다. 불자들의 오랜 가르침이기도 하다. '삼교지귀(三敎指歸)' 를 통해 유교, 불교, 도교를 분석하고 불교의 우위를 바탕에 두었다.

 

▲75번 사찰 젠쓰지(善通寺) 경내에 구카이 승려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75번 사찰 젠쓰지(善通寺) 경내에 구카이 승려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시코쿠(四國)는 일본열도의 가장 큰 육지인 혼슈를 기준으로 세도나이카이 바다 건너 가가와(사누끼), 에히메, 도쿠시마, 고치 등 4개현이 전부인 작은 땅이다. 이곳에서 대승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밀교를 확산시키고 자신도 수행에 전념했다. 가가와현 북쪽 젠쓰지시는 구카이의 고향이다. 젠쓰(善通)는 부친의 법명. 이 고장 이름의 유래다. 시코쿠 88개 절 들이 건립된 것은 이때 부터였다. 완성된 사찰을 따라 사람들은 1200킬로미터 순례 길에 나섰고 세월이 가면서 지금의 '오헨로 미치(道)' 가 되었다.
 
'오헨로' 는 순례자의 길이다. 흰색 상의(하쿠이)에 삿갓모자(스게가사)를 쓰고 지팡이(즈에)를 들면 준비는 끝난다. 헨로미치를 따라 88개의 모든 절을 돌아 원점으로 회귀한다. 불교의 윤회를 살아생전 실천하는 의미다. 처음 절 료젠지부터 마지막 절 오쿠보지까지는 걸어서 1개월 이상, 자동차로 1주일 정도의 여정이다. 순례는 마지막 날 오쿠보 절에 지팡이를 봉납하면 마무리다. 근대까지 오헨로 미치에서 순례도중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흰옷은 도중에 객사할 경우 장례를 위한 준비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티벳의 오체투지 루트 못지않은 장엄함이 담겨있다.

 

▲오헨로 미치 안내판. 화살표를 따라 가면 된다
▲오헨로 미치 안내판. 화살표를 따라 가면 된다

오헨로는 무수히 산을 넘고 수시로 태평양이 보이는 바닷가를 지난다. 절벽을 돌아 나오고 평야를 가른다. 유난히 산이 많은 시코쿠 산하 순례길을 민초들은 인생여정 그 자체로 여겼다. 걷고 또 걸으면서 자신의 심상을 들여다보려 했다. 인간의 어둡고 복잡한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답을 구하고자 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봤던가. 인간은 결국 무엇인가.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솟아오르는 질문들을 화두로 자신과 대화하며 걷는 고통 속으로 초대된 의식이다.
 
가다가 배고프면 이 고장 사람들이 건네주는 오세타이(떡이나 음료, 과일 등 간단한 요깃거리선물)를 받아 감사하게 먹으면서 전진한다. 무엇을 주더라도 거절하면 안 된다. 부처님의 뜻으로 공양하는 마음이니 받아 먹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허기만 달래고 자신과의 고행을 이어가다 보면 현실에 안주해 나태했던 '나'를 끝없이 일상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수행이 지나면 고행의 단계로 다시 그 너머에는 해탈을 향한 득도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나이에 접어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의식이 정돈되면 그 순간부터 근원과 죽음을 생각한다. 그때의 감정은 일렁인다. 이대로 죽을 수도 없고 이대로 살수도 없음을 안다. 어디론지 떠날 때가 되었다는 암시다. 그러면 떠나야 한다. 종교적인 이유나 자신의 심연에 출렁이는 파도나 시작은 마찬가지다.
 
마음속의 폭풍우를 잠재워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순례가 처방전임을 알았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지만 시대를 관통해서 현재까지도 삶의 이정표를 선물 받는 소중한 의식이다. 그것만으로 만족이다. 정신이 정돈되면 육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라마불교를 믿는 티벳 사람들이 '뤼'라고 부르는 육신은 마음을 가둬두는 한시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헨로 1200킬로미터 여정, 다이산지 대숲길
▲오헨로 1200킬로미터 여정, 다이산지 대숲길

시코쿠에 도착하던 날 다카마쓰 시내에서 세 번 만에 찾은 허름한 우동 집에 들러 한 그릇을 바닥까지 비웠다. 사누끼 우동은 여행자의 좋은 친구다. 가격은 착하고 푸짐하게 퍼주고 거기다가 맛도 있다. 이 우동은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난 메뉴다. 매년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로 수출되는 엄청난 물량이 가가와현의 주요 수입원이다.
 
허기를 때우고 84번째 절을 찾아 나섰다. 야시마지(屋島寺)는 멀리서 보니 그 이름대로 정말 큰 지붕 같은 산 능선의 형상이 바닷가에 정교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첫 번째 사찰 료젠지 에서 84번째 절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축지법을 능가하는 도술의 주인공은 자동차다. 골라서 점핑하는 순례라니. 나는 구기리우치(필요한 구간을 골라서 돌아보는 순례)를 선택한 것이다. 도시우치(시계방향으로 88개를 완주)든 사카우치(88번 절부터 거꾸로 돌아 완주)든 기회가 되면 반드시 나머지 사찰까지도 완주하리라는 다짐이 내 몸에서 넘쳐나는 오후다.
 
야시마지에는 너구리가 암수 청동상으로 모셔져 있었다. 시코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다. 가족사랑이 특별한 짐승이다. 사누끼가 '다누끼(너구리라는 일본어)' 로 변하여 우동과 라면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야시마지는 일본 전통 진자(神社) 분위기와 절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은 느낌이었다. 왼쪽으로 드넓은 사누끼 평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편은 세도나이카이 바다가 부드럽게 감싼다. 일본의 가장 큰 땅 혼슈를 향한 시코쿠의 염원이 배어있었다. '망해(望海) 호텔' 은 해원 전망대처럼 풍광이 뛰어났다.
 

▲경관이 가장 수려한 84번 절 야시마지 너구리상 앞에서
▲경관이 가장 수려한 84번 절 야시마지 너구리상 앞에서

구카이와 같은 선승들은 매일 밤 죽음의 리허설을 하라고 권한다. 누구도 다음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니 매일 잠자리에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눈을 감으라는 것이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벗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매일 죽고 태어나는 죽음의 리허설을 하다보면 삶과 죽음이 하나의 통로에서 서로 반갑게 만나고 있음을 느낀다. 나로 실재하는 것,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는 것의 에너지를 발견해내는 구도의 자세다.
 
영화 '구카이(空海)'의 장면들이 생각난다. 홍콩제작사와 일본 카도카와사가 합작으로 만든 작품(2018)이다. 유베 마쿠라 바쿠의 소설을 대본으로 중국의 유명 감독 첸 카이거(패왕별희 연출)가 재구성했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을 무대로 촬영된 화면은 인상적이었다. 구카이가 남긴 가치와 현대적 정신의 융합, 세대와 국경, 지역을 넘어 문화적 창조의 의미를 던져주는 영상이다.
 
언젠가 유달산에서 만난 구카이는 목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일등바위 밑에 부동명왕상과 함께 홍법대사로 서있었다. 일제의 개항도시 목포에 한국불교보다 일본 진언종의 밀교가 더 빨리 유입되어 서민층을 파고 든 역사의 흔적이다. 진언종은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통해 현세의 이익을 인정한다.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존중하는 종교다. 불교의 섭리와 주술적 미신체계가 전체와 개체로서 신비적 합일을 지향한다. 다양한 것의 통일로 사람들의 보편적 바람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88개 절의 모든 경내에는 승려 구카이의 부조가 있다. 헨로미치에는 20만개 이상의 공양탑이 공존한다. 이렇게 오헨로 미치를 다 돌아 마친다고 끝이 아니다. 번외 순례 20개의 절이 더 기다리고 있다. 다이산지(大山寺)부터 오타키지(大?寺)까지 숨어있는 암자를 다시 찾아 만나고 나서야 진정으로 마침표다.
 
88개 절집 돌고 20개 더. 불교의 백팔번뇌 가르침(108개 사찰 순례)인 셈이다. '시코쿠 벳카쿠 니쥬케쇼(四國別格 二十個所)' 다. 육체는 탈진하여 기력을 잃었을지라도 정신만 온전히 그 속에 중심을 잡으면 성공이다. 세상사는 모든 일이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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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동 2024-04-11 09:58:30
시코쿠 순례길 오핸로!

굳이 멀리 스페인까지 갈 필요없이
가까운 이곳을 가봐야 겠군요.

일본 불교 진언종과 구카이!
새롭게 찾아볼 주제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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