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시선] 기기묘묘한 아파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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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시선] 기기묘묘한 아파트 이름
  • 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3년 01월 13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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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은 정말 가관입니다. 동탄신도시를 예로 들어볼까요? 동탄역시범반도유보라아이비파크, 동탄역시범대원칸타빌, 동탄역시범유남퍼스트빌, 동탄역동원로얄듀크비스타, 동탄역시범더샵센트럴시티, 동탄역센트럴푸르지오, 동탄역롯데캐슬알바트로스…. 다들 이렇게 동탄역에서 가깝다는 걸 강조하는데, 이 이름 뒤에 '아파트'와 몇 단지나 몇 차까지 붙이면 몇 자가 되겠습니까? 부르기도 숨이 막히고 편지 쓸 때 한숨이 나옵니다. 술 취해서 택시를 잡을 때는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소 대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름이 긴 아파트 몇 개를 나열해보겠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와동동 가람마을10단지동양엔파트월드메르디앙, 남양주시 진접읍 해밀마을5단지반도유보라메이플타운, 고양시 덕이동 하이파크시티신동아파밀리에, 충남 내포신도시1차 대방엘리움더퍼스티지 등등.

이름이 아주 긴 아파트 몇 군데
이름이 아주 긴 아파트 몇 군데

이름이 길고 어려워지는 이유는 뭔가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외국어를 덕지덕지 붙이는 데다 시공사들이 합작을 하는 경우가 많아 2개 이상의 회사 이름을 다 넣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건축은 완공까지 최소 10년 이상 걸리는 바람에 주민들이 그럴듯한 이름에 더 욕심을 냅니다. 주변에 역이나 공원 같은 랜드마크가 있다면 역세권, 공원권이라는 점을 반영해야겠지요. 그래서 고급지고 살기 좋은 이미지를 담은 '세련된 말' 붙이기 경쟁을 하는 겁니다.

어느 아파트가 기존 이미지를 탈피하고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주민들에게 새 명칭을 공모했더니 무슨무슨 팰리스부터 모두 95개나 되는 이름이 접수됐습니다. 이걸 세 개로 압축해서 투표를 통해 그중 하나로 확정하는 과정이 2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아파트 이름 짓는 법'을 한번 살펴볼까요? 근처에 아무것도 없으면 더 퍼스트, 산이 있으면 포레스트, 계곡이 가까우면 밸리, 4차선 이상의 도로가 있으면 센트럴이나 애비뉴,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리버뷰나 레이크뷰, 바다가 가까우면 당연히 오션뷰 마리나, 공원이 있으면 파크 파크뷰 센트럴파크, 전철역이 있으면 메트로, 대학이나 학교가 있으면 에듀타운 이렇게 짓는 거랍니다. 근처에 노후건물이 많으면? 그때는 시티라고 붙이면 된다네요.

묘지가 보이는 아파트. 이런 곳도 얼마든지 '멋진'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퍼져 있다 
묘지가 보이는 아파트. 이런 곳도 얼마든지 '멋진'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퍼져 있다 

묘지가 잘 보이는 아파트는 뭐라고 작명을 해야 하나? 이것도 문제없습니다. 멋진 이름 많습니다. 묘지뷰 힐스테이트, 그레이브 뷰, XX(지명)래미안 시메티에르(cimetière, 묘지를 뜻하는 프랑스어), 하늘이 부르지오, e편한저세상, 선산we've, 조상복합, 죽음자리주택, 빈소지움 기타 등등.

이름이 어렵고 이상하다 보니 실제로 우스운 일, 사실일 법한 우스갯소리가 많아집니다. 한국의 무슨 캐슬, 팰리스에 사는 학생들은 미국 유학 가서 장학금 받기가 어렵습니다. 성이나 왕궁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까지 도와줄 건 없기 때문이지요. 택시를 탄 할머니가 '전설의 고향' 지나서 '니미시벌아파트'를 가자고 했는데, 기사가 잘 알아듣고 예술의전당 지나 리젠시빌아파트로 모셔다드렸다지요? 불지옥아파트를 찾는 할머니에게 푸르지오아파트를 안내한 아가씨는 정말 머리가 좋습니다. 난닝구 호텔은 어딘가요? 난닝구--->메리야스--->메리어트호텔이지요. 앞바퀴는? 아이파크구요.

한 여성은 네 살 난 손자에게 "우리 사는 곳이 어디지?" 하고 물으면 "엔스빌" 비슷하게 대충 얼버무리다가 이내 짜증을 낸다고 합니다. 귀엽다고 자꾸 물어보니 발음하기도 힘든데 짜증나는 게 당연합니다. 어른들도 어려운데 아이들이 더샵디어엘로, 센트레빌, 위브더제니스, 보네르카운티, 베르디움, 스위첸, 하이페리온, 웰러스, 리슈빌 이런 걸 다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짓는 이유는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게 한동안 정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어렵게 짓자 시어머니가 시누이 손 잡고 와서는 다시 찾아오기 힘들다며 안 가고 눌러앉는 일이 생겨 쉬운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새로운 주장이었습니다.

아파트단지 안의 경로당이 'senior club'이라고 영어로만 씌어 있다. 
아파트단지 안의 경로당이 'senior club'이라고 영어로만 씌어 있다. 

하지만 쉬운 이름으로 짓기는커녕 더 길게, 더 어렵게, 더 있어 보이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래미안개포루체하임'은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에다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을 붙인 경우입니다. 아파트 이름도 그런 식이지만 단지 안의 시설까지 헷갈리게 합니다. 부산의 어느 아파트는 관리사무소를 management office, 경로당을 senior club이라고 영어로만 써놓아 처음 이사 온 할아버지가 관리사무소에서 서류를 떼느라 몇 바퀴를 돌았다고 합니다. 계단도 stair라고만 표기해 노인들이 계단을 찾지 못해 헤매곤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가 아파트 이름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짓도록 유도하겠다는 뉴스가 반갑습니다. 며칠 전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법적으로 민간 아파트 이름을 규제할 근거는 없지만 작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권고하고,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을 경우 표창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겁니다. 서울시는 이미 지난달 29일 '알기 쉽고 부르기 쉬운 공동주택 명칭 관련 토론회'를 열었는데, 올해 2~3차례 더 토론회를 열고 건설사와 재건축조합의 의견도 들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기존 아파트 이름을 바꿀 때는 자치구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재건축 등으로 새로 지을 때는 별다른 규정이 없습니다. 현재 서울 시내에서 재건축·재개발을 추진 중인 아파트 단지는 601곳으로, 지금처럼 내버려두면 국적 불명, 정체불명인 아파트 단지가 쏟아져 나올 게 뻔합니다. 서울시가 지난해 11~12월 시민 1,0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4%가 "아파트 이름이 어렵고 비슷해 집을 찾는 데 헷갈린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2019년 전국에서 분양한 아파트의 이름은 평균 9.8자로, 1990년대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 행정당국이 나서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파트 이름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 시공사들이 어떻게 하면 알기 쉽고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지을지 고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은 정말 가관입니다.

이 글은 자유칼럼 (2023.1.6)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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