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알함브라 궁전, 워싱턴 어빙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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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알함브라 궁전, 워싱턴 어빙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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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 알마이신 언덕위에 우뚝 솟은 알함브라 궁전은 현실이 아닌 신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베리아 반도의 보물을 넘어 인류역사의 찬란한 유산이다. 오후의 햇빛을 가득 담은 알함브라의 돌기둥들은 가까이 할수록 눈이 부셨다. 철분이 가득한 흙으로 만들어져 성 전체가 짙은 노을처럼 붉게 보였다 그래서 아랍어로 '붉은 성' 을 의미한다. 인도 타지마할을 돌아보던 오후의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아름답고 세련된 건축이다. 인간의 손으로 빚었으되 인간의 솜씨가 아닌 듯하다.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은 에스파냐 공국 마드리드 주재 미 영사관의 영사로 임명(1826년)되어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차지하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여행했다. 4년의 체류기간 동안 업무와 병행해 순례와 글쓰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알함브라는 당시 그의 눈을 사로잡은 매혹의 대상이었다.

어빙은 아벤 하부즈, 무하마드, 하신타, 엘리자베타 왕비, 로페 산체스 정원사 등 숨겨진 무어인들의 연대기를 정리했다. 주변의 신화와 지형, 역사는 물론 알함브라 건축의 디테일을 '알함브라 궁전의 이야기'에 담아 귀국 후 미국에서 출간했다. 이 궁전의 유명세는 어빙의 탐사 리포트가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에스파냐 정부도 실행하지 못한 문화적 스토리텔링이 한 외교관의 호기심으로 이뤄진 셈이다. 그는 영국풍물을 수필로 쓴 저서 '스케치북'으로 이미 유명세를 탔던 문인이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어빙은 중세 왕궁이 남아있다는 소문을 따라 마드리드에서 멀리 떨어진 안달루시아 남부 그라나다를 찾아 방문했다. 이미 폐허화 된 궁전은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했고 허물어진 성벽은 방치되어 있었다. 숙소로 정한 여인숙이 너무 초라해 견디기 힘들었다. 먹을 곳이 없어 일대가 황무지를 연상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시종과 함께 알포르하스(안장주머니)에 먹거리를 두둑하게 넣었다. 구워진 새끼염소 다리와 자고새 한 마리, 종이로 싼 절인 대구, 햄과 롤빵, 무화과, 말라가건포도 등이 담겼다. 용량이 아주 큰 보타(가죽물병)에는 물과 발데폐냐스(스페인산 최고급 와인)를 채웠다. 나흘 동안의 최초 탐사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첫날 저녁 어빙은 폐허가 된 알함브라 궁전 중정에서 동네 사람 몇 명과 와인을 나눠 마시며 지나간 이야기들을 듣고 메모했다. 이 궁전은 무어인들의 800년 통치(732-1492)를 상징하는 현장이었다. 지브롤티 해협을 따라 올라온 이슬람 사람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으로 수세기를 군림했다.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로 물러갈 때까지 이방인들이 남긴 역사적 유물은 무관심과 지나간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 궁전 헤네랄리페 정원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와 레온의 페르디난드 왕자가 결합해 현재의 스페인이 출발했다. 고대 수도인 톨레도를 떠나 마드리드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다. 대항해 시대의 글로벌 패권을 누리며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준비였다. 에스파냐는 그라나다에 남아있던 마지막 무어인들까지 축출하고서야 진정한 통일을 이뤄냈다. 알함브라는 무언인 최후의 거점이었다.

궁전을 답사한 어빙은 외교관 업무를 접어두고 그라나다 예수회 대학도서관에서 먼지 쌓인 고서들을 뒤졌다. 그 수고 끝에 알함브라의 창건자가 무어 왕 알라흐마르(1198-1272)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나수르 가문의 대표였던 젊은 지도자가 무어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세비야를 정복하고 돌아와 개선문을 세운 그는 13세기 "알라 외에 정복자는 없다" 는 문양을 궁전 문고리에 새겨 넣으며 건축을 독려했다. 정복왕의 휴식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알라흐마르는 모든 신하들에게 역사를 배우고 구술하게 하였다. 문민통치를 지향했던 성군으로 무어인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여세를 몰아 나수르 왕국이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융성했고 완공은 유수프 1세까지 이어졌다.

어빙은 이 매혹적인 건축물의 마법에 사로잡혀 4개월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유령이 나왔다는 이유로 버려진 방을 개조해 지냈다. 안달루시아 여인들은 이 낯선 이방인을 잘 보살펴 주었다. 머리에 예쁜 천을 두르고 치마 끝단은 대롱모양 구슬이 장식된 깔끔한 차림의 현지인들이다. 영사의 신분으로 파견된 외교관이 이베리아 제국의 옛 영화가 담긴 궁전의 기억을 찾아 오랜 시간 머물던 숙소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200여 년 동안의 기억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워싱턴 어빙 룸
▲알함브라 궁전의 워싱턴 어빙 룸

무어제국은 유럽 사람들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고립된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람들이 뭉쳐 이뤄낸 거대한 문화유산이다. 침략자라는 무슬림의 정복원칙을 포기하고 안달루시아 남부에 안주해 지배권을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학적인 절제 속에 정교한 아라비아 문화가 꽃피워졌던 배경이다.

무어 통치자는 현명하고 공평한 법체계로 토대를 세웠다. 예술과 과학을 부지런히 연마했다. 톨레도와 코르도바, 세비아, 그라나다 등의 아랍 풍 도시들은 기독교 세계의 장인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동시에 궁전은 군사적 요새였다. 무어인 전성기에 4만 명의 군대가 알함브라와 그라나다에 주둔했다. 아랍인들의 패망 후 궁전은 거의 5백 년 동안이나 잊혀졌다. 국토수복 후 펠리페 5세(브르봉 왕가 사람 중 최초로 에스파냐를 지배함)등 스페인 왕들이 머문 때도 있었지만 무어시절의 영화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지역의 잦은 지진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발굴과 본격적인 복원공사로 현재의 모습이 갖춰졌다.

 

▲그라나다에서 만난 안달루시아 여인들
▲그라나다에서 만난 안달루시아 여인들

궁전을 한 바퀴 돌아 성채 출구로 나오는 동안 해가 기울어졌다. 하얀 대리석 분수를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무어식 아치 통로는 고상한 기품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부는 알카사바 성채와 헤네랄리페(여름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나의 성에 조금씩 다른 분위기가 합쳐져 조화로웠다. 전체 균형미와 웅장함 못지않게 예술적 디테일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벽은 화려한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정밀하게 치장되었고 삼나무 목재로 마감한 둥근 천정은 높이 때문에 신성함을 더해 주었다.

화려한 도금위에 아라비아 세필로 그려낸 무늬들은 한 차원 다른 예술의 경지였다. 모든 창은 두꺼운 벽을 삼중으로 깎아낸 뒤 아랍 전통의 아치식으로 마감되었다. 그라나다 일대의 평원을 바라보기 알맞은 구조다. 장미와 배롱나무, 오렌지 관목과 시트론(이베리아 감귤)이 울타리를 이룬 격조 넘치는 파티오(마당)들, 태양의 이동에 따라 연출되는 대리석 열주의 그림자는 이들이 천상의 파라다이스를 꿈꾼 흔적처럼 보였다.

무어 왕은 화려한 사자의 정원에서 그 시절 각국의 사절단을 영접했다. 스페인 시대에는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 탐험 길에 오를 때 이사벨라 여왕이 임명장을 수여하며 제국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인간은 세월 앞에 녹이 슬고 부서지는데 알함브라의 기둥들은 시간을 넘어서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알함브라 사자의 정원
▲알함브라 사자의 정원

무어인들은 근처 다로강의 푸른 숲속 물줄기를 수로로 연결해 궁전으로 끌어들였다. 로마인이 만든 세고비아 수로와 비슷한 개념이다. 덕분에 욕실과 어항은 항상 맑은 물로 가득 채워졌다. 낮에는 시원한 분수가 하늘을 수놓게 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황야를 타고 올라오는 공기는 강렬한 태양과 만나 알함브라를 연중 뜨겁게 달군다. 때문에 주 정원 지하에는 목욕탕이 만들어졌다. 장식과 모자이크 디자인은 소문대로 동방의 분위기가 많이 담겨있었다.

흰색의 높은 탑들과 긴 아케이드로 연결된 위풍당당한 관목정원에서 나는 왕조의 전성기를 상상하고 싶어 한참을 서 있었다. 헤네랄리페(여름궁전)는 공중정원 사이 산을 마주보도록 지어져 무어의 왕들이 바람을 더 잘 느끼면서 시원하게 한 계절을 지날 수 있게 했다. 지붕에 내려 꽂이는 태양의 열기는 코마레스 탑 아래로 지나가는 나의 정수리까지 화끈거리게 했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1852-1909)는 궁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무어인들의 애잔함과 실연의 아픔을 담은 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남겼다. 신비로움과 우수의 선율이 트레몰로 주법으로 구성된 이곡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많은 영화의 무대로,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시대를 디자인하는 중심지로 알함브라는 아직도 거기에 우뚝 서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밤
▲알함브라 궁전의 밤

8백년의 영광도 짤막한 환상처럼 끝났다. 군주와 사재, 전사들은 물론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었던 무슬림들의 모습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는 해는 웅장한 알함브라 성채를 사선으로 쓸쓸하게 비추며 지나갔다. 멸망한 왕조의 화려했던 지난날을 기억하려는 낮 시간의 기세는 석양에 밀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성채 건너 편 골목카페에서 허기를 때우고 서성거리는 잠깐 동안 세상은 벌써 어두워져 월광이 지배하고 있었다. 달빛 속에 가고 오는 세월의 균열과 틈, 명멸했던 사람들의 자취가 고요 속으로 차츰 엷어져가는 중이다. 태초의 하얀 빛깔을 되찾아가는 궁전 대리석 기둥들 사이로 희미한 광채가 왕조의 기나긴 풍화를 덮고 있었다.

달빛에 물든 그라나다 언덕은 신비로웠다. 양옆으로 펼쳐진 대지가 남쪽의 시애라 네바다 산맥과 조화를 이루며 흐릿한 수묵화처럼 다가왔다. 마주보는 알함브라 궁전은 적막했다. 못다 한 무어 왕조의 옛 이야기들이 내 귓가를 지나 어둠속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장미꽃이 뒤덮인 그라나다의 여름밤은 수많은 나이팅게일(밤 꾀꼬리)들의 노래에 실려 깊어만 갔다. 내일은 이곳에서 작은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토레 데 라 벨라". 소녀들이 노처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종을 울리는 축제란다.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불멸을 지향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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