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부산' 자본시장 역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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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부산' 자본시장 역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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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지훈 기자]
군산 구 조선은행 앞 전경. [사진=김지훈 기자]

[컨슈머타임스 김지훈 기자] 여행을 좋아하는 금융 기자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자본시장의 역사를 길 위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열광했던 어느 만화 속 주인공이 된 마냥 한국거래소 학예사가 직접 선별해 전국 14곳으로 내던진 구슬을 찾아 헤매고 왔다고 할까. 이는 3박 4일간의 자본시장 역사탐방이자 12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기도 하다. 땡볕과 폭우에 몸은 지쳤을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처럼 설레고 열정적이었다. 희비가 교차했던 자본시장의 역사를 리와인더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편집자주>

이번 주 자본시장 역사 여행은 수도권을 벗어나 군산‧부산 등 지방에서 시작한다. 답답한 빌딩 숲을 벗어나 들과 산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과거 군산미곡취인소가 자리했던 터다. 

수도권에서는 자본주의 역사를 품고 있는 장소들이 현대적이라 느끼지 못했는데 군산은 과거의 흔적들이 현재도 잔존하고 있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군산미곡취인소의 경우 일제 강점기 때 설치돼 농산물(쌀과 콩 등)이 선물거래됐던 곳으로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주요 배경이 된다.

이 소설은 1937년 10월부터 1938년 5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됐는데 모함과 사기·살인 등 부조리로 얽힌 1930년대의 한국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어낸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군(郡)의 고용원을 지낸 정주사의 딸 초봉이는 정주사가 미두(米豆)에 미쳐 가세가 기울어지자 약국 제중당에서 일을 했다는 부분이 있다. 소설 내내 군산 미곡취인소 시장에서 가산을 탕진해가는 조선인들의 삶을 노골적으로 그려내기에 이 장소는 자본주의 역사 장소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문학 작품의 배경이자 암울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다.

군산미곡취인소 과거와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미두장은 당초에 일본인들이 조선에서의 쌀 착취를 위해 이전의 재래시장 중심의 자율거래를 금지하고 조선 전역의 미곡 거래를 독점적으로 장악해 미곡의 배급 통제를 위해 만든 민관 합작회사다.

이 회사에서 쌀의 시세를 결정하는 과정에 시세 차익을 놓고 벌이는 놀음이 생기는데 이를 '미두'라 한다. 3개월 단위로 미리 쌀값을 예측해서 이루어지는 선물거래의 한 유형이다. 실제 쌀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점에 쌀을 사거나 팔 권리가 거래되는 것이다. 개인끼리 하는게 아니라 미두취인소라는 중매소를 이용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의 주식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주식시장이 있었으나 자본주의 역사가 짧았던 조선 사람들은 주식보다 쌀에 관심이 더 많았기에 미두시장이 더 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해한 자본의 원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미두가 대박을 터트리는 일확천금의 기회로만 세상에 알려지면서 조선 사람들의 투기심리를 자극해 미두 열풍은 큰 사회문제가 됐다.

구 조선은행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현재 이곳은 풀이 무성한 공터만 남아있다. 하지만 길 건너 구 조선은행 건물 주변에 가면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현장 묘사 동상 등을 볼 수 있다.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과거 모습을 현재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존재한다. 구 일본 제 18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군산미곡취인소- 구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신흥동 일본식 가옥- 해망굴- 구 군산세관 본관 등 군산 근대문화 코스를 함께 돌아볼 것을 권한다.

(왼쪽) 1926년 부산곡물상조합 전경. [사진=한국저작권협회] 부산근대역사관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더운 날씨 시원한 군산의 명물 콩국수를 한 사발 들이키고 부산으로 핸들을 돌렸다. 강, 들, 바다를 지나 해가 내려앉은 부산에 도착했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또 다른 미두취인소인 부산곡물상조합이다.

일제강점기 부산부 대청정(전 중구 대청동)에 위치했는데 정확한 위치 선정이 어려워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대체했다.

이 장소는 현재는 부산근대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부산에 설치된 쌀과 콩과 같은 농산물이 선물거래됐던 부산미두취인소의 모태 기구이다. 거래소 설립 후 조선에서 유일한 현물 거래 시장이었던 부산 정미 시장을 운영했는데 1933년 당시의 매매량이 930만304엔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고 한다. 이곳 시장의 매매 물건은 쌀과 대두, 잡곡 등이며 매매자는 조합원에 한정됐다. 시장의 개폐 시간은 매일 오전 9시에서 정오까지였다.

구 한국은행 부산지점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 회사의 부산지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부산시는 시민들에게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근대역사관으로 조성했다.

현재는 부산근현대역사관 조성 사업으로 인해 공사 중이다.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를 통합해 부산항 개항부터 6.25전쟁, 경제성장, 민주화를 이룬 부산의 근현대 모습을 담을 예정이다.

부산근대역사관 옆에 위치한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도 함께 들러볼 것을 권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초량왜관과 조선은행이 있었던 장소로 6.25 때는 두 번의 화폐개혁이 이뤄진 금융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구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자리했던 부산 하버뷰 빌딩 [사진=김지훈 기자] 

다음 행선지는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있었던 곳이다. 2005년 증권거래소, 코스닥증권시장, 코스닥위원회 및 선물거래소가 합병해 통합거래소인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출범했다. 출범 당시 본사 사옥이 있던 자리이다.

2000년 전후로 세계 거래소는 '토막'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또한 당시에는 이렇게 다 따로 있었다. 이걸 통합하기로 하고 2004년에 한국증권선물거래소법을 제정해 2005년에 토탈 마켓인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출범한 것이다.

현재는 LG유플러스 고객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당시 활발했던 자본시장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왼쪽) 한국전쟁 당시 부산 중구 일대 모습. [사진=연합뉴스] 현재 부산세관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발걸음을 옮겨 부산 앞 바다에 위치한 부산세관 건물로 향한다. 과거 대한증권주식회사 부산출장소가 자리했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전쟁기 증권시장이 없던 시절 임시 수도 부산에서 지가증권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장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토지 유상 몰수‧유상 분배를 하고 북한에서 무상 분배‧무상 몰수를 하니까 우리 쪽에서는 미국의 역량에 의해서 유상 몰수‧유상 분배 과정에서 토지 제도를 개혁하게 되고 지가증권을 발행하게 된다. 지가증권은 이 시기 정부에서 매수한 토지의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 증권을 의미한다.

지가증권이 발행되고 또 건국국채도 발행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진다. 유가증권이 시장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임시 수도에서는 피난 시절에 광복동 거리에서 지가증권을 매집하는 증권회사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종의 장외 시장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 보니 당시에 지가증권을 매입하기 위해 소리치며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이 일대 거리에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동안 공식적인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 주로 국채와 지가증권 위주로 장외에서 거래가 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과거 이 장소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는 암울한 모습은커녕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며 부산세관 옆에는 과거 이 장소에 존재했던 교보생명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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