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몬테레이에서 만난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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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몬테레이에서 만난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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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다. 책이라는 물건은 읽으면 읽을수록 또 읽게 되고 더 읽게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쓰고 싶고 무엇인가를 쓰면 다시 또 찾아 읽고 그러면 더 쓰게 된다. 쓰다 보면 결국 가방을 챙겨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렇게 찾은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해변이었다. 코로나로 연금당한 오랜 시간 뒤의 탈출이다.

파도와 바람과 햇빛이 알맞게 영글어 언제나 기품 있는 풍경이다. 멕시코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이 해안선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올라오다가 툭 튀어나온 몬테레이만을 발견(1701년)한 이후 이곳은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가지런한 해안선, 풍부한 어 자원과 기막힌 기후 때문에 돈과 시설이 몰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축적된 자본은 몬테레이와 세븐틴마일스, 카멜 까지 인근지형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미 해군대학원이 들어섰고 해양연구소와 세계적인 규모의 아쿠아리움(수족관)까지 미국인들을 끌어들이는 안테나다. 자갈들이 뒹굴던 페블 비치에 골프장(1919년)이 문을 열었고 이어서 스패니쉬 베이와 사이프러스 포인트, 스파이그라스가 완공되었다. 세븐틴마일스는 단숨에 세계최고의 휴양지로 바뀌었다. 마차가 지나던 길은 왕복 10차선의 고속도로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해안의 다양한 문명이동 통로로 자리 잡았다.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해변이다. 그 사이 바위는 파도에 씻겨나가 모래가 되고 싱싱했던 싸이프러스 나무들은 부분부분 고사목화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드는 바다안개가 아름다운 해변을 비단주머니에 넣었다 꺼내주곤 했다. 그 세월 동안 날카로운 나의 시각은 무디어졌고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바람과 태양만이 쉼 없이 시간의 흐름으로 윤회할 뿐 생명들은 풍화되어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20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존 스타인벡(Jhon Steinbeck. 1902-1968)의 노벨상 수상작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는 이곳에서 쓰여 졌다. 글을 쓰며 파도를 마주했던 바닷가 오두막집은 북적이는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작은 흉상 하나가 남아 잊혀져가는 대작가의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길거리 전봇대에는 스타인벡의 얼굴이 그려진 커리커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 고장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대형청동조각 작품이 갖가지 삶의 모습으로 흉상 뒤편을 지키고 있었다. 낚시를 하거나 포커를 즐기거나 농사일을 하는 주민, 발아래 개구리 이동과 어린아이 표정까지 생생하다.

 

▲몬테레이 해변의 존 스타인벡 흉상
▲몬테레이 해변의 존 스타인벡 흉상

스타인벡은 몬테레이 근처 살리나스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하였다. 스탠포드대를 중퇴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으로 내몰렸다. 별장지기와 벽돌운반, 마차수리 같은 잡일로 떠돌았다. 암울한 청년기였다. 그래서 그는 늘 사회 하층에서 소설의 줄거리와 주인공을 골라냈다. 미국자본주의의 모순이 노동자, 농민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투영되는 스타일이다.

스타인벡의 첫 작품은 <생쥐와 인간에 대해> 였다. 비천한 두 이주노동자의 우정을 그렸다. 이 작품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나중에 희곡으로 각색되어 뉴욕의 공연무대에도 올랐다. 그 바람에 차를 한 대 가지게 되었고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로 여행을 떠났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땅에서 이자를 내지 못해 자본가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캘리포니아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이주민들과 긴 여정을 함께 했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표작 <분노의 포도>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톰 조드 일가는 대공황기 오클라호마에서 모든 것을 잃고 푸른 땅 캘리포니아로 엑소더스를 시도했다. 육체와 정신이 진공상태로 파멸당한 뒤의 결정이었다. 기근과 자본가의 토지수탈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역시 노동과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지주들은 가격유지 때문에 오렌지더미에 석유를 부었다. 수천마리의 돼지를 죽여 생석회를 뿌리고 땅에 묻었다.

개미같이 일하면서도 굶주리는 노동자의 마음속에 영글어가는 분노의 포도, 캘리포니아 농장의 포도는 농장주의 것이고 먹을 수 없는 분노만을 일으키는 포도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좌절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굶주린 민초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송이송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다. 그 분노의 포도는 수확기를 향해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고 있었다." -분노의 포도 중에서.

스타인벡은 삶의 참담한 공포와 경제적 혼란상태의 한 가운데를 관찰자로서 관통하고 있었다.

주인공 톰 조드의 동행인 선교사 존 케이시를 통해 구원과 희망을 성서적으로 풀어내려고 애쓴 흔적들이 소설 곳곳에서 감지된다. 같은 생각들이 다른 소설 <에덴의 동쪽>에도 흐르고 있다. 광야에서 인간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영혼을 찾으러 뛰쳐나간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 같은 것은 현실에 없다는 사실만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단지 커다란 영혼의 아주 작은 조각들만 나뒹굴 뿐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영혼 일부도 나머지 영혼들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때문에 <분노의 포도>는 출간되면서 법정에 제소되어 금서가 되었지만 오히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준 기폭제가 되었다.

 

▲아름다운 몬테레이 항구                                                 ▲세븐틴 마일스 해변의 풍경
▲아름다운 몬테레이 항구                                         ▲세븐틴 마일스 해변의 풍경

이따금 오가는 트램(오래된 전차) 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샌프란시스코 비탈진 도심 한복판 롬바드 거리 아래 숙소에서 눈을 떴다. 갑자기 간밤의 꿈 이야기를 메모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편지지나 메모장을 찾을 수 없었다. 스마트폰 시대의 단면이다. 할 수 없이 가져온 책의 여백에 습관처럼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창밖 유니온스퀘어의 넒은 광장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스타인벡 작품 백일장의 심사위원이었다. 제출된 원고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살피고 당락을 결정하는 역할이다. 분노의 포도송이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가는 현실을 딛고 그래도 이세상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시인 에머슨 스타일의 희망찬가 지향 노력이 필요함을 설파한 대목들이 내 마음과 상통해 당선작을 결정했다. 영혼의 파편에 맞아 고통 받고 분노하는 것보다 그 영혼 모두를 품에 감싸 안고 싶어진 지금의 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꿈에 만난 꿈같은 이야기다.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언덕아래 도심지 끝 멀리 금문교가 보이고 북쪽 나파밸리와 소노마에서 포도를 익혀준 바람구름대가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내려가면 몬테레이 이고 다시 소설가의 오두막집터를 만날 것이다.

존 스타인벡은 집을 자주 비운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이혼을 당했다. 작가로서의 숙명이었는지 방랑벽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유작으로 남긴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은 독특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찰리(애완견)를 로시난테(돈키호테의 말을 패러디한 자동차)에 태우고 40일 동안 광활한 미 중서부 여행 끝에 남긴 말이다.

"사람이 여행하는 게 아니고 여행이 사람을 데리고 간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여러분께 보내드리는 인문칼럼은 베스트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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