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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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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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설악산 대청봉에서 계곡을 따라 백 번째 연못이 있는 곳. 백담(百潭)은 오늘도 봉정암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모아 소리 없이 5월의 창공으로 띄우고 있었다. 하늘로만 열려있는 절간마당은 어느덧 여름 맞이로 분주하다. 산중의 준봉들은 연 초록빛 색 기둥의 모습으로 제각기 거칠게 서있고 지상으로 흘러내리는 꽃잎들만 송홧가루에 버무려져 무심히 흩날린다.

강원도 인제를 지나 용대리 계곡을 탄지 몇 시간 만에 만난 내설악 백담사는 그렇게 나그네를 맞이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곳에서 불도를 닦고 출가한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잔잔한 언어들이 마음으로 살아온다. 고향 충남 홍성을 떠나 어린 나이에 속세를 버리고 백담사로 출가한 그가 암울했던 시절, 조국을 그리면서 불렀던 시어(詩語)들이 여기저기 들풀처럼 뿌려져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님의 침묵'을 줄줄 외우고 '나룻배와 행인'을 곁들어 편지를 쓰던 나 같은 민초들도 이제 초로에 접어들었다.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만해의 손때가 묻은 노래 가락과 행장들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1890년대 동학농민전쟁과 항일의병활동을 보면서 시대정신을 따르고자 했던 만해는 당시 설악산 오세암에 처음 당도해 백담사에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의 혁신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잡지 '유심'을 발간했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해 33인의 서명과 동시에 3천부의 인쇄물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3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고문으로 피폐해진 육신이었지만 구걸하거나 의지가 꺾인 독립군들을 꾸짖으며 그 꽂꽂함으로 서대문 형무소를 녹여냈다. 변절자를 용서하지 못한 성품 탓에 최남선이나 최린 등은 죽을 때까지 만해를 대면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릿발 같은 기개다.

   
 
법당의 돌계단을 내려오니 '나룻배와 행인'이 새겨진 자연석 시비(詩碑)가 서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마디마디 새긴 만해의 대표작이다. 그의 끈질긴 저항정신이 설악의 신록을 가득 채운 듯 하다. 시비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대각선 방향으로 낯선 편액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극(極) 락(樂) 보(寶) 전(殿)'
거기 찍혀있는 낙관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해(日海) 전두환(全斗煥).
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만해와 일해는 서로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 기구한 만해와 일해의 대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백담에 얽힌 역사의 무상함에 놀랐고 두 사람의 운명에 또 한번 놀랐다.

광주학살과 5공 군부 독재의 주인공으로 1988년부터 769일 동안 유배당한 전두환씨가 자신의 친필로 쓴 편액을 걸고 떠난 것이다. 후세사람들은 이곳이 만해의 절인지 일해의 절인지 혼란스러울 것 같다. 경내의 찻집 농암정에 걸터앉아 목을 축이면서 짧은 순간 생각을 정리했다. 농암(聾巖)이라. 벙어리 바위가 아니겠는가. 보았어도 못 본 척하고 알아도 말하지 말고. 그랬나 싶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말이 없다. 만해의 시비를 보는 시선으로 일해의 편액을 올려다보고 그저 지나간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글귀다.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세상의 모든 것은 본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줄어드는 일도 없고, 늘어나는 일도 없다"

 
   
 
부처님은 온데 간데 없고 티끌 같은 속세의 두 인간이 남아 백담계류로 흘러간다. 그도 저도 흘러가면 후세에 또 누가 이곳에 역사의 무늬를 만들겠지. 애국도 민중의 반역도 모두 묻어버린 세월 앞에서 찰나의 시비에 휘말려 사는 인간들이여.

다시 내설악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춤추는 꽃술들과 신록의 바람, 명경지수만이 유장하게 한 시절을 뽐낸다. 어느 해 산사태로 평평해진 계곡에 정성 들여 쌓아 올린 중생들의 돌탑이 끝없다. 더러운 속세의 업보를 저렇게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마음을 씻고 돌아갔으리라. 그들이 지은 작은 허물 하나까지도. 애국자도 품고 독재자도 품어내는 불심의 세계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미물에 지나지 않는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불가사의의 세계일 뿐, 만해와 일해가 마주보는 백담사는 오늘도 말이 없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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