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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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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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루마니아의 디바

 

비올레타의 절규가 공명으로 가슴을 파고 든다. 옥타브를 넘나드는 음색, 폭넓은 성량, 소리의 단단함에다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출렁인다. 소프라노 디바가 움직일 때마다 아리아의 치열함은 듣는 이의 숨을 멈추게 한다. 비올레타는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춘희'를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든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이다. 거리의 여인인 그녀가 귀족청년 알프레도를 사랑하면서도 신분 때문에 더 다가설 수 없는 운명이 눈시울을 적신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 중에서 '달에 부치는 노래'는 잔잔한 월광의 움직임으로 시작되어 천상까지 끌어올려지는 하이톤이 백미였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한 여인의 종말이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세상을 적신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무대를 꽉 채운 팔등신 미인 가수의 거대함이 청중을 압도했다. 이 시대 최고의 소프라노 디바, 안젤라 게오르규를 만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음악계의 변방으로 취급받는 동유럽 루마니아 출신이다. 1965년 루마니아 몰도바의 작은 마을에서 철도기관사의 딸로 태어나 여동생 엘레나와 함께 클래식 방송을 들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14살 때 부쿠레슈티 음악원 최우수 졸업으로 가능성을 주목받고 27살 되던 해 세계적인 지휘자 게오르규 솔티와 함께 런던 로열오페라 무대에 서면서 월드스타가 되었다. 안나 레트렙코와 함께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이어갈 재목으로 꼽힌다. 촉촉한 음색이 서정적이면서 강한 무게감을 실어내는 그녀는 분명 루마니아의 보석이다.

 

안젤라의 이번 내한 공연에는 태너 스테판 마리안 포프가 함께 했다. 올해 25살의 젊은 청년이지만 지난해 서울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1위에 오른데 이어 밀라노 오페라 경연과 플라시도 도밍고 대회까지 휩쓸었다. 테너 불모지 루마니아가 배출한 스타로 파파로티 이후 차세대를 이끌어갈 후보로 평가받고 있다.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오 사랑스런 아가씨'로 뿜어내는 포프의 열창은 안젤라의 미성에 버무려져 찰떡궁합이다. 어느 거장 듀엣 못지않게 갈채가 쏟아졌고 그들의 빼어난 가창력은 관객들의 연속 앵콜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또 한사람, 이날 지휘자로 나선 이온 마린 역시 루마니아 인이다. 매력적인 눈매에 길게 늘어뜨린 장발은 그가 마에스트로인지 배우인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기도 한 그는 부쿠레슈티 조르쥬 에네스쿠 음악원을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한 뒤 전 세계 30여개 오케스트라를 섭렵했다. 스위스에서 날아와 코리안 심포니를 지휘하는 그의 손끝에서 '나부코'와 '예브게니 오네긴'이 날개를 달고 청중들의 귓전으로 솟아 오른다. 강렬함이 부드러움으로 덮여지면서 열정적인 몰입이 교차하는 매력, 젊음이 묻어나는 감각적 리드가 돋보였다.

 

드라큐라 백작과 짚시, 아니면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스타 나디아 코마네치 정도로 알려진 루마니아는 우리와 비슷하게 1948년 독립했다. 하지만 바로 스탈린체제에 강제 편입돼 동유럽 공산주의의 나락으로 빠졌고 독재자 챠우세츠쿠의 학정은 경제와 전통을 거덜냈다. 동유럽 최빈국으로 추락한 뒤 1989년 민주화로 사회주의를 걷어 냈지만 아직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격차가 크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 꿈을 키운 세 명의 젊은 음악가가 한데 모여 한국의 관객을 감동시킨 무대는 분명 인상적이다. 오랜만에 보는 뮤직 내셔널리즘의 환희랄까. 어색함 하나 없이 지휘자와 태너, 소프라노가 같은 나라 친구로 어깨동무하며 관객의 앵콜을 네 차례나 받아주는 친근함은 공포정치와 가난에 찌든 루마니아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라틴계지만 음악은 오히려 슬라브 색채가 강하다. 이들은 헝가리나 터키의 짚시들과도 관계가 깊어 감상적인 민요 도이나가 유행하고 수많은 크리스마스 캐롤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정통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그다지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낭만파 음악가 에미네스쿠나 극작가 이오네스쿠의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등이 알려져 있지만 문화면에서 이렇게 탁월한 오페라 스타들이 길러졌다는 것은 정말 기대를 뛰어넘는 유쾌한 반란이다. 안젤라 게오르규의 공연이 아니라 압제와 설움에 시달린 그들의 조국, 루마니아의 밤이었다.

 

세 사람은 이미 내년 공연스케줄까지 거의 찼다고 한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얼마나 될까. 그 돈들이 경쟁에서 떨어진 자국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용기를 주겠지. 그리고 그 음악을 듣는 세계인들은 루마니아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면서 예술의 깊이에 존경을 표하겠지. 참 흐뭇한 일이다.

 

루마니아는 유난히 북한과 가까웠다. 괴팍한 두 독재자 챠우세츠쿠와 김일성은 특별한 친분을 과시한 적이 많다. 물자교류도 비교적 빈번했고 왕래도 많았다. 평양과 부쿠레슈티는 자매도시 이상의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똑같은 기간에 함께 공산주의의의 길을 걸었는데 양쪽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것은 루마니아 민주화 20년의 결실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헛된 선동을 접고 재능 있는 만수대 공훈배우들을 안젤라처럼 세계적인 디바로 키워 낼 수는 없을까. 안타깝다. 우리가 조수미나 신영옥을 길러냈듯이 북한이 세계적 스타를 키워 낼 수는 없는 것일까. 국제사회와 생각을 같이 하면서 비록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품위 있게 살아 갈수는 없는 것일까. 공연이 끝나고 기립박수로 장내가 뜨거워졌지만 객석에 홀로 고립된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잠깐의 역사 동안 뒤바뀐 두 나라의 운명 때문에.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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