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루쉰(魯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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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루쉰(魯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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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상하이 무더위는 장난이 아니다. 수은주가 41도까지 치솟는다. 오죽하면 이곳을 4대 화로지방으로 불렀을까. 중국 장강((長江)을 기준으로 강남의 상하이(上海) 우한(武漢) 난징(南京) 충칭(重慶)을 화롯불 같이 더운 지방이라 하여 쓰따훠루(四大火爐) 로 꼽는다. 그 폭염을 헤치고 오랫동안 고대했던 루쉰을 만나러 갔다. 중국인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 받는 그의 문학세계는 낯설지 않지만 남겨진 자취를 찾아 나서 긴 처음이다. 수없이 오간 상하이 방문길에 왜 이번만은 루쉰을 따로 챙겨 보고 가리라는 생각을 한 건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일까.

고층건물이 즐비한 푸동(浦東)의 천지개벽을 한 바퀴 돌아 황포강 건너편 푸쉬(浦西) 안쪽 옛 시가지의 루쉰 공원을 찾았다. 울창한 숲 속 평일 낮 발길이 뜸한 기념관은 한산했다. 깔끔하게 단장된 건물입구에는 더위에 지친 몇 사람이 주저앉아 있었고 인민해방군 복장을 한 초병만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실내에는 미력하나마 에어컨이 가동 중이다. 낡은 원고지와 유품들, 후배 문인들과 시대를 토론하는 실물크기의 밀랍인형실. 격동의 세월을 지낸 아래층 행적을 돌아 2층 중앙홀로 이어지는 루쉰의 청동흉상까지. 차가운 금속으로 섬세하게 새겨진 표정이 유난히 따뜻하고 인자하다.

잘 단장된 기념관을 돌아 나와 북쪽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에게 루쉰 못지않은 영웅을 찾기 위해서다.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제 시라카와 대장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사나이 윤봉길. 하지만 윤의사의 자취는 너무도 초라했다. 작은 돌비석 하나가 전부인 흔적 앞에 그저 멍하니 한참을 서있었다. 언젠가 중국정부는 공원이름도 바꿔버렸다. 윤봉길의 거사현장 '홍구공원'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루쉰공원' 은 다소 낯선 이름이다. 다만 중국의 정신적 스승과 한국의 영웅이 같은 땅에 나란히 간직돼 시대를 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위안을 삼을 수밖에.

루쉰은 본래 상하이 근처 저장성(浙江省) 샤오싱(紹興) 사람이다. 추워지면 따끈하게 데워서 한잔하는 이른바 샤오싱주(紹興酒)의 본 고장. 대지주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자란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당시 선진국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센다이 의전(현재 도호쿠대학 의학부)에서 수업도중 스파이로 잡혀 생매장되는 중국인들의 실상을 스크린으로 보고 생각을 바꾼다. 의술로 사람을 고치기보다 문학을 통해 고국의 정신을 바꿔야 한다고. 결단은 단호했다. 그는 즉시 상하이로 돌아와 치열하게 문학인생을 시작했다.

▲ 상하이 루쉰기념관 정문 앞에서

아시아 재패를 꿈꿨던 일본의 야망에 맞서 중국의 자각을 온 몸으로 외치던 세월이 지나고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기에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상하이에서 숨을 거둔 루쉰. 마오의 문화혁명이 지나고 뒤늦게 사회주의 정부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문학세계는 인간본성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철저하게 탐구하고 꾸짖고 스스로 반성하는 궤도를 조금도 이탈하지 않았다. '무덤', '열풍', '외침', '방황'으로 이어지는 단편 시리즈는 물론이고 '고향' 이나 '광인일기' 의 정신도 인간의 집요한 심리추적이다. 최고의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 에서 그려지는 "정신승리법"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신승리법이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자기가 처하게 된 불이익이나 폭력적 상황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자기를 위안하고 넘어가면 어떤 모순도 다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큐는 돈이 생길 때마다 도박을 한다. 늘 잃고 있다가 어느 날 큰돈을 딴다 그러나 그 돈을 강도에게 빼앗기고 무자비한 폭력까지 당한다. 아큐는 그 순간 내가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지렁이였다면 사람이 지렁이를 밟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을 하고 따라서 자신의 처지가 슬프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시켜버린다.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맞서봐야 해결할 수 없는 나약한 개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렇게 합리화 시키지 않으면 살수 없는 것이 민초들의 인생이므로 그저 순응하고 긍정하면서 자기를 달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처절한 방법 찾기이다. 그 개미 쳇바퀴 인생들을 대신해서 고단한 시대의 처지를 그려내려는 모습이 소설가 루쉰의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큐를 통해 중국인들의 바보 같은 인생을 꾸짖고 싶은 마음이 숨겨진 메시지라고 봐야 한다. 나약한 개인으로 흩어지면 영원히 굴종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부당함을 강요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정의를 부르짖고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이것은 아마도 개혁개방으로 물질은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정신은 메말라가는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다시 청량한 생명수를 뿌리고 싶은 대상으로 루쉰을 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나라 말기 정처 없이 떠나온 샤오싱을 다시 돌아보고 쓴 소설 '고향' 에서 그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100년 가까이 지나온 과거, 그 험난한 시절에 이런 혜안을 가졌다니 끝을 알 수 없는 대 문호의 정신세계가 경이로울 뿐이다.

낡은 대결구조와 지키지 못할 공약들이 자기합리화로 간단하게 용서되어야 하는 우리현실을 돌아보면 '루쉰의 길' 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도 남북도 경제도 그저 여럿이 힘을 합치고 정직하게 만들어 가야 새로운 길이 열릴 텐데. 지금처럼 잘나있는 길도 외면하고 자꾸 과거의 산으로 엉뚱한 길을 고집하면 이것은 희망을 접고 세월을 뒤집어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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