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 정부 경제 비화] ④ '모피아' 강만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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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근혜 정부 경제 비화] ④ '모피아' 강만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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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와 고락 같이한 '동지'…두 번의 금융위기 겪어
   
▲ 풍운의 인물 강만수. 그는 '모피아'(재무부 마피아)의 '대부' 격인 인물이다.

[컨슈머타임스 윤광원 기자] "사무실을 정리하고 뒷 산에 올랐다. 과천청사 건너 청계산에 겨울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바위에 앉아 간절한 기도를 했다. (중략) 어릴 때 살던 시골 동네 서재 뜰에 피던 매화가 생각났다.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추위가 가시기도 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조선조에 부자가 함께 9년이나 귀양갔던 두 할아버지의 고난을 생각했다"

강만수의 자서전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2005년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대목이다.

그는 이른바 '모피아(재무부 마피아)'의 대부 격인 인물이다. 재무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합쳐 탄생한 '공룡' 부처 재정경제원에서 차관까지 지내다 지난 1997년 한국을 덮친 외환위기를 겪고, 김대중 정부 출범으로 1998년 3월 과천 관가를 떠나 야인(野人)이 되었다.

강만수는 물러날 당시 심경을 위 글에 담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상징인 매화를 떠올리고, 자신의 상황을 '귀양살이'에 비유한 것.

"3년전 어느 날 찾아온 '재정경제원'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공룡은 사라졌습니다. 재정경제원 간판이 내려지는 날, 뒷 산에 올라 지난 공직을 회상했습니다. (중략) 모든 것은 IMF의 늪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IMF로 가는 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불을 끈 사람은 누구인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IMF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가 직원들 앞에서 읽은 고별사의 일부다.

바로 위 상사였던 강경식 전 재정경제원장과 이경식 전 한국은행 총재,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환란(換亂)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구속된 게 당시 분위기였다. 강만수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그가 10년 후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과천에 '금의환향'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출판기념회장에 나타난 이명박

2005년 4월 어느 날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강만수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실로 몇 년만에 그가 주인공이 된 날이었다. 관료시절 선·후배들이 대거 모여들어 책 출간을 축하해줬다. 윤증현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도 나타나 축사를 했다.

현직 장관급 인사가 공식 행사가 아닌 일반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한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나타난 인물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차기 대통령후보로 급부상하던 인물, 바로 이명박(MB) 서울시장이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MB가 직접 찾아올 정도로 강만수와 가깝나?'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만수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사람들은 그가 확실한 'MB의 사람'이 됐음을 깨달았다.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망교회에서 MB를 만나다

사실 강만수는 원래 MB와 별 안면이 없었다. 그들이 '동지'가 된 것은 압구정동 소망교회에서였다.

MB와 형 이상득 전 의원은 소망교회의 독실한 신자다. 소망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MB가 교회를 증축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 MB에게 교회 2층의 한 작은 골방에 앉아 있는 한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강만수였다.

당시 강만수는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있긴 했지만, 연구실도 직원도 없이 소망교회 한 구석에서 빌붙어 지내는 처지였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7년 MB와 박근혜 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전이 시작되자, 강만수는 시정개발연구원에 사표를 내고 캠프에 참여했다. MB가 대선후보가 되고 난 후 캠프에 합류한 인사들과는 공헌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MB의 경제 관련 공약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강만수가 대선후보 캠프에 불러온 또 다른 재정경제원 출신 후배가 장수만이다. 그는 초대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을 끝으로 관료생활을 마친 상태였다.

강만수는 재무부 출신이고 장수만은 경제기획원 출신이지만,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장수만은 MB정부에서 조달청장으로 화려하게 관가에 복귀했다. 이어 국방부 차관과 방위사업청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정권창출의 '공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법이다. 그는 2011년 건설현장 식당 운영권을 둘러싼 이른바 '함바 비리'에 연루돼 불명예 퇴진했다.

◆'환율주권론'과 최중경 '대리경질'

MB정부 첫 기획재정부장관이 된 강만수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관 초기 그의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환율주권론'에 따른 외환시장 개입과 그 후폭풍인 '대리경질' 논란이다.

환율주권론이란 용어는 강만수의 자서전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중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유래했다.

"경상수지는 그 나라 경제의 종합건강지수이고 환율은 대외적으로 나라경제를 지키는 '주권'이며 환율관리는 경제적 대외 균형을 지키기 위한 '주권행사'다. 환율을 관장하는 재정경제부 장관이 환율을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주권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중략)

경상수지가 감내하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될 때 정부는 대외 균형을 선택하고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중략)

환율과 외환보유고를 중앙은행에 맡겨야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것은 정부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임무는 물가안정이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환율을 평가절상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정상적일 때 통상적인 업무는 몰라도 대외 균형이 깨지게 될 때는 환율을 중앙은행에 위임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시장에 맡겨서도 안된다"

강만수와 당시 최중경 기재부 제1차관은 취임 때부터 줄곳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원화가 너무 고평가돼 있으며,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환율이 올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일관되게 전달한 것.

고환율 정책의 실무 총책은 최중경 차관이었다.

그는 노무현정부 초기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시절부터 강경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최틀러(최중경+히틀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3~2004년 사이 거의 14조원에 달하는 원화를 쏟아부어 환율 하락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 일환으로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 개입했다가 1조8000억원의 손실을 초래,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는 '꼬리표'가 됐다.

고환율 정책은 한편으론 위험한 정책이다. 물가상승을 유발하고 해외 유학생을 둔 가정의 부담을 증가시키며, 미국 등 외국과의 갈등을 자초한다.

기재부의 고환율정책에 외환당국의 다른 한 축인 한국은행은 강력 반발했다. 학계와 야당, 언론에서도 환율은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면서 정부 정책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강만수와 최중경은 강경했다.

두 사람의 공조는 4~5월 예상을 뛰어 넘는 물가 급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가상승에 대한 우려를 청와대로부터 전달받은 강만수는 유연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반면 최틀러는 "고유가로 물가는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성장정책마저 포기하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강경책을 고수하려 했다.

'광우병 사태'를 겪은 MB정부는 7월 들어 첫 개각을 단행했다.

이때 강만수가 유임되고 최중경이 퇴진하자, 강만수 대신 최중경이 '대리 경질' 됐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여당의 공성진 최고위원 조차 "국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정책기조가 최근 민생, 물가안정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 맞는 책임자가 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상당히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이에 당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실무적으로 환율에 대한 최종 책임자는 차관"이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최중경은 곧 부활했다. 강만수의 힘이다.

경질 2개월만인 9월에 주필리핀 대사로 나갔다가 2010년 4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화려하게 돌아왔고 이듬해 1월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최근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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