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 정부 경제 비화] ③진짜 '실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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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근혜 정부 경제 비화] ③진짜 '실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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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형통' 이상득 우리은행장 인사에선 어땠을까?
   
▲ 이명박정부 초기 청와대 인사를 총괄하며 이상득의 '손발' 노릇을 했던 박영준

[컨슈머타임스 윤광원 기자] 이명박(MB) 정부 초기에 '6인회'라는 실세 그룹이 있었다.

6인회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MB를 도왔던 원로그룹으로 MB와 이상득, 박희태, 최시중, 이재오, 김덕룡이 멤버다.

이상득은 MB의 친형이고 박희태와 김덕룡은 2007년 이명박 선거캠프의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최시중은 MB의 '정치적 멘토'로 알려져 있고 이재오는 '친이계'의 핵심 인물이다.

이들은 MB가 대통령이 되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세 그룹 6인회의 부상과 몰락

박희태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에 참여, 군부정권을 비호했다. 전두환·노태우 군부정권이 끝난 후에도 그는 이회창의 측근으로 당 요직을 섭렵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 한나라당 대표와 국가서열 2위인 국회의장에까지 올랐다.

김덕룡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학생운동 시절부터 MB와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MB정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위원회 상임의장을 지냈다.

최시중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이상득과 서울대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부국장, 한국갤럽 사장을 거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다. 그리고 초대 방송통신위원장이 되어 실세로 군림했다.

이재오는 학생운동과 인권운동을 하다가 YS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해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를 거쳐 MB정부에서 국민권익위원장으로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MB정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박희태는 당권 경선 전당대회에서 돈봉투를 돌렸다는 폭로가 고승덕 의원에게서 터져 나오면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덕룡은 저축은행 비리사건에 연루됐고, 19대 대선에서는 뜬금 없이 여권에서 뛰쳐나와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가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최시중은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로 구속됐고 이재오는 안병용 당원협의회 의장의 비리가 폭로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다른 실세들은?

6인회 외에도 실세라 불린 인물들이 또 있었다.

천신일은 세중나모여행(현 세중) 회장으로 MB의 후원자였다. 고려대 교우회장도 지냈다.

그러나 2010년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사인 임천공업 이수우 대표에게 워크아웃 관련 청탁의 대가로 47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장기간 해외 도피를 시도하기도 했다.

정두언 전 의원은 MB정부의 '개국공신'이라 불렸다.

그 정도로 MB정권 탄생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상득과 갈등을 빚고 권력 핵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저축은행 사태 때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임태희 전 의원도 MB정부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장,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진식 전 의원은 청와대 경제수석, 대통령실 정책실장, 18~19대 의원을 역임했다.

유우익 MB정부 초대 대통령실장은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반도 대운하 공약 구상을 처음 기획한 인물이다.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산업은행장을 지낸 강만수도 실세 중 실세였다.

국무차장과 지식경제부 차관을 지낸 박영준도 빼놓을 수 없다.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 초대 청와대 인사비서관을 거쳤던 박영준은 원래 이상득의 보좌관 출신으로 서울시장 시절부터 MB의 대선출마를 도왔다. 이후 청와대 인사팀을 좌지우지하면서 이상득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그러나 파이시티 사건으로 구속됐다.

◆'만사형통' '영일대군' 이상득

그러나 그 누구도 MB의 친형 이상득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코오롱 대표이사, 13·14·16·17·18대 의원, 한나라당 사무총장,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그는 MB정부 내내 모든 인사를 제멋대로 주물렀다. 

박영준이 이상득의 '수족' 노릇을 했다.

박영준이 청와대를 떠난 후에는 인수위 시절부터 그의 수하였던 김명식(TK출신) 인사비서관이 이상득과 박영준의 손발이 됐다. 인사팀 선임 행정관은 MB의 서울시 출신이고 또 다른 행정관은 MB의 대선 외곽조직이던 '선진국민연대' 출신이었다.

이렇다보니 정부 고위 공무원, 공공기관 등은 물론 금융기관,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민간기업에 이르는 모든 인사를 이상득이 좌지우지했다.

그런 그에겐 '만사형통(萬事兄通. 만사는 형님을 통한다)', 참여정부때 '봉하대군'으로 불렸던 고(考)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에 빗댄 '영일대군' 등의 별명이 붙었다.

이상득과 박영준의 인사전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포스코 회장 선임과정 개입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검찰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상득과 박영준은 2008년 11~12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차례로 만나 차기 포스코 회장 선임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이구택 회장의 임기가 1년 가량 남은 상황이었음에도 회장 교체에 나선 것.

이들은 이구택에게 노골적으로 사임을 요구하고 후임으로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을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정준양은 2009년 2월 포스코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이상득과 박영준은 정준양의 포스코에 이런 저런 압력을 넣어 특혜를 챙긴 것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포스코에 대한 전방위 수사에도 불구하고 '녹슨 칼' 검찰은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이상득의 측근들이 운영하는 협력업체 티엠테크, 원환경, 뉴태성 등에 26억원 어치의 일감을 몰아주도록 청탁한 혐의로 이상득을 '불구속' 기소한 게 전부였다.

◆우리은행장 이종휘 낙점, 왜?

MB정부 초기 금융계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2008년 6월의 우리은행장 인사였다.

이종휘 당시 부행장과 이순우 부행장이 행장 자리를 놓고 맞붙었다.

우리은행은 1999년 1월 옛 '상업은행'과 옛 '한일은행'이 합병해 출범한 '한빛은행'의 후신이다. 합병 후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두 은행 출신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종휘는 '한일맨'들의 대표였고 이순우는 '상업맨'들의 지지를 받았다.

우리은행은 정부(예금보험공사)가 대주주여서 인사는 최고 권력자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금융계에선 설이 분분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줄을 댔을 것이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인가.

결과는 이순우 부행장은 다음을 기약하며 행장 지원을 하지 않았고, 이종휘가 우리은행장에 올랐다.

이에 대해 금융계 일각에서는 이상득이 아닌 MB에게 직접 줄을 댄 이종휘가 승리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이순우(현 저축은행중앙회장) 측의 주장은 다르다.

이순우측의 한 인사는 "당시 상업과 한일출신들이 은행장 자리를 놓고 '이전투구'를 한다는 얘기가 너무 많고 또 다시 외부에서 은행장이 올 수 있기에, 상업은행 선배들한테 욕을 먹으면서도 은행장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진실은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이순우는 3년간 수석부행장으로 있다가 결국 우리은행장 자리에 올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다림의 미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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