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stimes.com
2016.09.20

 

 
교토 료안지의 침묵속에서

 

누구도 말이 없었다. 공간은 넓고 허한데 그 사이에는 침묵이 가로놓여 있었다. 마루바닥에 앉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침묵하되 적막하지 않았고 금언하되 고독하지 않았다. 구도하되 눈을 감지 않았고 깨어있으되 말하지 않았다. 조용함은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죽비로 어깨를 내려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부드러운 고요속에 묻혀 모두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료안지(龍安寺. 교토의 대표적 사찰, 유네스코 세계유산)경내로 이어지는 마루에는 그렇게 오후를 보내는 이들로 가득했다. 시선은 하나같이 앞마당에 펼쳐진 가레산스이(枯山水)에 꽂히고 있었다. 하얀 모래와 돌로 다듬어진 마른 정원(石庭)이다. 나무도 꽃도 연못도 없다. 15개의 돌은 바다에 떠있는 섬을 의미한다. 생각이 커지면 그 돌들은 무한한 우주의 행성과도 연결된다. 크기와 높낮이, 위치가 묘한 원근감으로 다가왔다.

돌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14개다. 나만은 찾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나머지 1개는 어떻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선종의 메시지임을 모르고 덤빈 까닭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15개의 돌을 모두 볼 수 있다는데. 모래밭의 돌을 헤아리는 동안 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자신의 근본을 묻고 있었던 셈이다.

 


   
▲교토 료안지 방장정원의 참선객들.


밖은 울창한 스기(杉)의 위용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 그늘아래 단풍이며 동백들이 지나가는 바람을 한 자락씩 가두어 묘한 화음으로 재생시켰다. 날짐승들의 노래만이 가끔 적막을 깨트렸다. 그래서 가레산스이는 죽은 정원이 아니라 생명의 동산이었다. 질서정연하고 가지러한 조화를 마음에 새겨 넣고 영원을 꿈꾸는 곳. 마른 정원은 나의 시선 속에 다시 정교한 정물화로 살아오고 있었다.

교토시내 2천개의 사찰 중에서도 료안지를 으뜸으로 치는 이유를 알만하다. 정신수양과 디자인, 건축, 조각, 철학의 실마리까지 세계를 휩쓴 ‘젠(禪)’ 의 발상지답다. 미국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아시아류(流)’ 의 으뜸으로 ‘젠’ 을 꼽았다. 선종은 원래 인도의 보리다르마, 즉 달마가 남북조시대에 창시한 불교의 한 갈래다.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했다. 세월이 흘러 젠 으로 일본에 정착한 것이다. 젠ZEN)은 선(禪)의 일본식 발음이다. 절제와 단순미를 추구하는 동양적 여백이 아름다운 단어다. 서양의 미니멀리즘과도 상통한다.

중국에서는 사라진 참선의 세계가 교토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세상의 중심이었던 당나라 장안(현재의 시안)을 모델로 만들어진 도시, 교토의 한 가운데에 료안지를 지어 참선으로 인간을 구하고자 했던 대목에 이르면 의문이 풀린다. 선불교 임제종은 이렇게 일본 참선문화의 뿌리로 자리 잡았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의 진리를 로고스로 여긴다.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한다” 는 임제 선사의 가르침은 언제나 깊다.
 


   
      ▲오유지족을 담아내는 료안지의 샘물.                      ▲나의 존재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
 

지금 세상은 물질보다 정신의 피폐로 고통 받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 공허함을 젠 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료안지 경내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선종의 진리 속에서 나 자신을 찾으려 했지만 마지막에는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손을 씻고 목도 축일 겸 옆 마당 우물가로 향했다. 입구 자(口) 모양의 통에 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도쿠가와 마쓰쿠니가 기부해서 소문난 쓰쿠바이(손씻는 그릇)다. 네모난 물 받침 사방으로 五, 隹, 矢, 足 이 새겨져 있었다. 합쳐지면 ‘오유지족(吾唯知足)’ 이다. “오직 스스로 족함을 안다” 는 선종의 가르침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쯤 절간 문을 나섰다. 방향도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걸었다. 무성한 늦여름을 가로질러 리스메이칸(立命館)대학 정문까지 내려왔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고개를 들었다. 선(禪)은 명상을 통해서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다. 그러려면 번뇌를 씻어내야만 한다. 번뇌는 마음의 먼지다. 일탈이 안주하는 집으로 간주된다. 이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나의 마음속은 세상의 온갖 먼지로 수북하다. 그 먼지를 벗겨내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고 회복해야 가능한 일이다. 숱한 인연과 자식, 재산, 지위, 속박과 욕망의 상징인 현재(家)를 떠나야 이뤄지는 일이다. 그럴 수 없는 속세에 몸부림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의 폭풍만을 불러일으킨다. 무서운 번뇌다. “세상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는 깨달음의 나이에 접어든 걸까. 모를 일이다. 상처받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고 하지 않았던가.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