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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이승만, 프린스턴대 100년의 추억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여름비는 유서 깊은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를 낮은 회색빛으로 덮어버렸다. 유난히 긴 미국 대학의 방학을 몰랐다. 뉴욕에서 2시간을 달려 찾은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대학원은 여름 휴강 중이었다. 지하 1층에 있다는 특별강의실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외부에 표시가 없기 때문이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이 텅 비어 버린 건물을 서성거리다가 용기를 냈다. 당직 교수실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사정을 설명했다. 멀리서 온 여정임을 알리고 꼭 보고 싶다는 설명을 곁들여. 안경을 낀 듬직한 체구의 여교수는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나섰다.

이승만 기념 강의실(Syngman Rhee Lecture Hall)은 거기에 있었다. 1910년에 받은 박사학위 취득 100년이 지나 만들어진 공간이다.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강의실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명을 올리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암울했던 나라 조선을 대리한 식민지 청년의 자취를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국가의 행정시스템 개혁과 정책결정을 비롯한 공공분야의 이론수업이 매일 진행되는 공간이다.

출입문 오른쪽에 걸린 동판에는 그의 사진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늘 보아오던 헝클어진 흰 머리에 주름진 얼굴이 렉춰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로 이 강의실을 만들기 위해 헌액한 주요 기부자 10명과 프린스턴대학 동문 8명의 명단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프린스턴에 유학 온 전 세계 미래 지도자들은 이 홀에서 치열한 연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역사 속 이승만의 메시지와 영감을 주고 받는다.


   
▲프린스턴대 이승만 렉처홀에서 현지학생과 함께.

 

이 강의실을 위해 재미 동포 사회는 몇 년 동안 5억5천 만 원을 모았다. 프린스턴 대학 출신 정운찬 전 총리와 김종석 교수 등이 앞장서고 구자홍, 정몽준, 홍석현 회장 등이 뜻을 보탰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얻은 국제적 안목과 지식으로 대한민국 초대 정부를 세우고 공산주의와 맞섰다. 프린스턴 대학은 한국인들의 정성을 빛내기 위해 토론과 학술대회 기금으로 이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있다.

윌슨은 당시 대학원장이었다. 이승만에게 학위를 수여했다. 나중에 총장이 되고 뉴저지 지사를 거쳐 미국의 28대 대통령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했다. 윌슨은 자녀 결혼과 가족들의 백악관 파티에 초대장을 보낼 정도로 이승만을 아꼈다. 가난한 청년을 돕기 위해 윌슨이 직접 써서 지도교수에게 건넸다는 ‘학위심사비 면제 메모’ 는 찾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실패했다.

댕기머리 미소년 이승만은 평양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우다가 경성의 배제학당에 입학을 하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엄청난 변화의 파도를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가 늘 궁금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과 문화적 충격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훗날 이승만은 프린스턴 시절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때로 회고했다. 민족자결과 인권, 약소국의 생존방식을 고민하며 꿈을 키워나간 성장기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윌슨 공공정책대학원.                   ▲계단식 경사디자인으로 설계된 이승만 기념 강의실.

 

프린스턴은 1754년 영국의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장로교도들이 목사양성을 위해 만든 교육원이었다. 26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건물이름이 ‘낫소홀’이었다. 150년 전 뉴저지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1896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으로 개칭되었다. 미국에서 4번째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이다. 그래서 그런지 캠퍼스 건물들은 중세의 수도원 분위기가 짙다. 육중한 화강암 구조에 로마 건축양식의 정문, 벽에 배치된 조각 동상들이 타임머신 역할을 해준다. 300년 세월을 견딘 거목과 화강암 건물들을 돌아 큰길(낫소 스트리트)로 나왔다.

 


   
▲프린스턴대의 고풍스런 캠퍼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미국과 협조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 반공, 반일의 정책노선을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위해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망명지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막힌 기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고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해 일탈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정적암살 등의 비극은 아직도 미결상태다.

“각 시대는 그 시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지, 각 시대는 지나간 시간속의 사람과 사건들 중에서 오늘의 시대에 동화하고 변화시켜 행동화 할수 있는 것만을 적절히 선택할 뿐이거든”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제 이승만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훨씬 많아졌다. 어두운 시대의 횃불을 밝히고 선진학문을 공부했던 프린스턴의 기억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마오나 호치민 같이 동시대 아시아의 위대한 국부를 바라던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가 국부인지, 실패한 독재자인지의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시간을 먹고 재탄생한다. 좀 더 기다려볼 일이지만 그것은 역사가의 영역이다. 나는 그저 프린스턴의 희망차고 신선했던 ‘청년 이승만’ 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후 내내 프린스턴의 고풍스런 캠퍼스를 서성거렸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