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잠겨 죽다, 연극 'M. 버터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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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 잠겨 죽다, 연극 'M. 버터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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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폭과 깊이 돋보여

  ▲ '르네'를 열연 중인 배우 이승주_연극열전

이 연극은 농밀한 멜로일까, 관습을 뒤튼 영리한 정치극일까. 아니면 환상에 빠져 본질을 외면한 한 인간에 대한 심리극일까. 외려 시니컬한 웃음 코드의 블랙코미디로 분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극 'M. 버터플라이'가 수작인 것은 그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폭과 깊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르네 갈리마르의 안내로 시작된다. 1964년 중국 베이징, 프랑스 영사관 직원이었던 그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초초상으로 출연한 송 릴링에게 매료된다. 별 볼일 없는 남자였던 르네는 꿈꿔왔던 완벽한 여성인 송을 만나 잊고 살았던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되찾는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국가 기밀 누설죄라는 죄목 앞에 재판정에 선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여인 송이 남자이자 중국의 스파이였던 것이다. 그가 믿었던 현실은 환상의 경계에서 삽시간에 휘늘어져 버리고 만다.

연극 M. 버터플라이는 다층적이다. 표피의 이야기를 벗기면, 그 안엔 상징이 있고, 그 상징을 파고들면 작가의 농밀한 사상이 뒤끓는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복잡하지 않다는 것도 미덕이다. 쭉 뻗은 이야기 가지와 풍성한 상징의 이파리들은 실화라는 튼실한 뿌리를 기반으로 멋들어진 한 그루 나무를 그려낸다.

▲ '송 릴링' 역의 전성우와 '르네 갈리마르' 역의 이승주_연극열전

작품은 철저히 르네의 발자취를 따른다. 별볼일없는 남자로 살아온 그는 송을 만나며 내면에 부재했던 남성성에 대한 욕망을 일깨우고, 권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한다. 그 속에서 송은 완벽한 여자이며, 르네는 완벽한 여자의 완벽한 사랑을 받는 남자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환상은 송의 탈의로 쉽고도 무차별적으로 깨어진다. 그는 마주함 대신 차라리 자신의 환상 속에 잠겨 죽는 것을 택한다.

이야기는 굴절의 연속이다. 르네는 환상(버터플라이)속에서 송의 실체를 굴절시키고, 송은 국가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왜곡한다. 르네와 찰나의 만남을 가졌던 소녀 르네 역시 꼬맹이(성기)라는 존재 속에 남성들의 관습적인 성질들을 비약한다. 굴절과 굴절이 만나 낳는 것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환상일 뿐이다.

이야기는 절절한 러브스토리로도 읽힌다. 극에는 여러 번 르네가 송이 남자였음을 알고 있다는 단서가 등장한다. 20년간 단 한 번도 송의 옷을 벗기지 않은 것, 송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것 등만 해도 그렇다. 마지막에는 르네가 직접적으로 고백하기도 한다.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그에 대한 송의 답변들은 쓰고 아리다.

"나는 단지 한 남자가 아닙니다. 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라고나 할까", "날 꿰뚫어 보도록 도와주려는 거예요"

그는 르네에게 실체를 보라고 말한다. 만들어진 환상 속의 버터플라이가 아닌 그 알맹이에 있는 자신을 보라고 간청한다. 르네는 실체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환상과 사랑에 빠진 남자, 그 남자의 숭배를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 그 사이의 간극을 동성애라는 한 단어로만 채우기엔 지나치게 여운이 강렬하다.

▲ 배우 이승주와 전성우가 'M. 버터플라이'의 한 장면을 열연하고 있다._연극열전

연극 M. 버터플라이의 무대는 초연보다 더욱 조밀해졌다. 세종M씨어터보다 폭이 좁아진 아트원씨어터의 무대는 한층 가까워진 객석만큼 극과 관객의 밀착력을 높였다. 무대 사용은 원 세트를 구석구석 쓰면서도 공간의 여백을 조명으로 적절히 다듬었다. 조명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운용되며 인물들의 내면을 무대 위로 밀어 올렸다.

이 작품의 완성에는 배우들의 몫이 빠질 수 없다.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이승주는 르네 역을 맡아 다시 한 번 자신의 넓이를 증명했다. 그는 등장과 함께 근사한 외양을 완벽히 지우고, 결핍된 남자 르네를 덧입혔다. 처음의 집중을 끝까지 이어가는 정성과 상대 배우와의 긴밀한 호흡도 인상적이었다. 송 역의 전성우는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서 기묘한 줄타기놀음을 했다. 여릿한 인상에서 주는 묘한 분위기는 역할과 합을 이뤄 관객을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극 M. 버터플라이에는 허투루 놓인 것이 거의 없다. 감정의 일장일단을 섬세하고 폭넓게 갖고 놀면서도, 구성의 치밀함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빈틈없는 극은 관객을 환상의 저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연극 자체가 버터플라이며, 우리는 그 환상에 사로잡힌 르네가 되는 셈이다.

송의 대사 중에 "날 꿰뚫어 보도록 도와주려는 거예요"라는 말이 있다. 연극 M. 버터플라이는 그런 연극이다. 우리가 환상을 바로 보도록, 현실이 아닌 실체를 보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 연극 속에서라면 거부하고 싶다. 무대 위 환상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지는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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