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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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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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1

 

정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블랙홀이 세차게 소용돌이를 시작했다. 불확실성을 잔뜩 머금은 경제가 견디지 못하고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던 새시대의 공약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경제의 파도는 거칠다. '국민행복정부'의 업무접수가 시작 되면서 흐름이 별로 좋지 않다. 우선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그 어떤 전망도 확실하지가 않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빼면 대부분의 산업은 죽을 쑤는 중이다. 뭔가 획기적인 성장동력 엔진을 달아주고 싶지만 이는 미래를 진지하게 준비했을 때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죽기살기로 경제에 전념해도 시원찮은 판에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판의 패싸움은 점입가경이다. '국정원 살리기'와 '국정원 죽이기'.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국민들과 관계없는 다른 나라에서 리그전을 뛰는 듯한 분위기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드러났으면 이는 명백히 불법이요 국기문란 행위다. 그런데 NLL 발언 공개로 장면을 뒤집어 어느 쪽이 문제인지 가치판단이 몹시 헷갈린다. 반복학습으로 익숙해진 패턴이기는 하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잔꾀와 물타기의 구태가 여전한 국정원 드라마는 또다시 정치혐오증을 키우고 있다. 뒷걸음질 치는 경제를 추력으로 밀어 올리는 힘은 정치에서 나온다. 정치가 안정된 나라는 대개 경제가 함께 꽃을 피운다. 이런 바램은 아직도 우리에게 기대난망인가.

초나라의 미치광이였던 접여(接輿)가 공자 곁을 지나면서 외치던 노랫소리다.

봉새야 봉새야.
어찌 그리 덕은 쇠 하였는가.
지난일은 탓해서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도 있는 것.
아서라 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다.

자신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13년 동안 70여 개 나라를 주유하고 임금들을 설득했지만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공자가 마침내 68세 노인이 되어 정치가로서의 야망을 꺾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의 수레 곁을 지나치면서 이처럼 노래를 하였다. 정치란 어차피 2천 년 전 접여의 노래처럼 위태롭고 어리석은 미친 짓인지도 모른다. '정치가 어리석고 미친 짓'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어느 시대에나 관통하는 공감이 아닐까.

공자가 열국을 주유하면서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왕도정치다. 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이다.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맹자는 패도를 경계했다. .'무력으로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 덕으로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라는 설명이다.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요, 덕으로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패도보다 왕도를 더 숭상해왔다.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은 맹자였다. 정치를 보는 눈은 동서양의 시각이 정확히 일치한다.

옛날 정치는 학자나 선비가 담당했다. 그 시대의 석학이었던 주자는 이미 통탄하고 있었다. 과거에 학자(정치가)는 자기를 위해서 공부하고 그 은은함으로 선정을 베풀었지만 요즘의 학자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내보이기 위해서만 정치를 한다고 비판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나라와 미래를 위한 정치는 실종되고 자신의 사욕과 파당적 행태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함은 참으로 신통한 대목이다.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단 한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고백이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전쟁터에서 돌아와 정치에 뛰어들었던 백전노장도 무서운 정치에 치를 떨었다.

공자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대 그리스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원전 427년에 쓴 최초의 작품 (연회의 사람들)에서 선동정치가들이었던 '데마고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오늘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학식이 있거나 성품이 바른 사람들이 아니다. 불학무식한 시정 잡배들에게나 알맞은 처세와 직업이 바로 정치라는 너저분한 세계"라고 일갈했다. 오죽했으면 이랬을까 싶다. 물질문명은 광속으로 발전을 거듭하며 달려왔는데 정치의 구태는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저 그 모양이니 뒤집어보면 그래서 정치가 재미있고 사람들을 더 미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에 있어서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 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건만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마는 이유를 알고 싶다.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어떤 나라 어떤 통치권자를 막론하고 진수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하다. 그 난파선에서 자기들끼리 찧고 까불다가 결국은 세월의 무대 뒤로 사라져 가는 것. 그런 먼지만도 못한 허무가 정치의 본질이다.

조광조가 지치주의(至治主義)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하늘의 신명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다. 본질은 역시 패도가 아닌 왕도정치다. 권모술수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줘야 민초들이 따르고 신뢰하는 것이 시대를 넘어선 정치의 기본이다. 왕도정치의 공감대는 지금도 유효하다. 난장판으로 가고 있는 현실정치를 조금이라도 진전시키려면 대통령부터 왕도정치의 기본을 다시 생각할 때다. 지금처럼 패도정치가 판을 치면 외교도 경제도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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