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 보니파시오
상태바
잊혀진 영웅 보니파시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http://www.cstimes.com
2013.05.27

 

잊혀진 영웅 보니파시오

 

 

 

 

마닐라 공항은 여전히 좁고 혼잡하다. 비행기가 내릴 때마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노동자 혈육'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자정무렵 착륙한 기내를 빠져 나와 허름한 청사로 들어서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입국장은 온통 사람과 소음으로 뒤범벅이다. 이곳이 시장통인지 국제관문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땀으로 온몸이 젖어 짐을 찾고 차를 타는 순간까지 기나긴 인내의 실험이었다.

다음날 새벽 맞이한 보니파시오의 아침은 찬란했다. 가난과 혼란으로 찌든 공항과는 딴판이다. 잘 정돈된 현대식 아파트 단지와 국제 쇼핑몰이 즐비한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GC)는 여기가 과연 마닐라인가를 의심케 했다. 개발 이전에 와봤던 수렁 잔디밭이나 움막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빈민가, 골프공이 진흙 속에 박혀 사라지던 미군기지 시절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마닐라 도심에 100년 이상 자리했던 주둔군이 떠나고 그자리에 감각적인 국제도시가 재탄생 한 것이다. 건물배치와 디자인, 분위기 모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마라톤을 즐기는 주민들 틈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300여명의 젊은이들이 신나게 말춤을 즐기는 구경거리는 흔치 않은 소득이었다. 호텔과 국제학교, 대형 백화점, 타워팰리스 단지를 능가하는 초고급 아파트단지 사이로 외국계 은행과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이주해오고 있다고 한다. 단지를 벗어나면 구름처럼 널려있는 수상가옥의 빈곤과 부패한 세상이 온전히 양극을 이루는 기막힌 대치다.

보니파시오는 19세기 필리핀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다. 1897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 당할 때까지 민중을 사로잡는 위대한 지도자로 큰 족적을 남겼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863-1897). 380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끝장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청년이다. 재단사 아버지와 담배공장 막노동꾼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 세상을 등진 부친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프랑스 혁명사와 세계역사를 섭렵하는 이론가로 무장해나갔다. 포용의 리더십에 반해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함께 하기를 간청해왔다. 중세부터 내려오던 자유석공들의 정신적 클럽인 프리메이슨의 회원이 되면서 혁명의 국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기회도 만들어 냈다.

   
 

20대 후반 호세 리잘이 이끄는 독립단체에 참여해 3번이나 체포됐다. 그때까지 이어져 오던 혁명의 판을 귀족중심에서 민중중심으로 바꾼 뒤 독립단체 카티푸탄을 조직했다. 한때 4만명이 넘는 부하들을 거느렸지만 스페인 군에 붙잡혀 민다나오에 유배된 뒤에도 민중의 총공격을 조종하다가 자기 세력의 배반으로 최후를 맡는다. 필리핀 역사에서 유일하게 이뤄지려던 민중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족계 영웅 호세 리잘(1861-1896)보다 빈민의 영웅 보니파시오를 더 간절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죽던 해 미국은 괌과 하와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세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필리피노들의 뜻에 따라 떠나는 미군기지자리의 신도시 이름을 '보니파시오' 로 명명한 것이다. 영욕의 역사다. 강산이 열 번도 더 변하고 나서야 신도시 이름으로 돌아온 영웅은 마닐라 시민들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시티의 개발이익은 이 나라 최대 부동산 그룹인 아얄라가 모두 챙기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와 군부, 관료들의 부패 커넥션이 연결돼 있음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1억 명 이상이 절대 빈곤에 허덕이지만 10% 지배층은 최고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로 이어지는 귀족 정치세력들은 세습에 세습을 거듭하며 일족이 부와 권세를 독점하고 있다. 영화배우로 유일한 서민 출신 대통령 에스트라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기득권층의 집단 이지메와 끝없는 검찰고발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말라카냥 궁을 떠났다. 부패와 사치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이멜다는 남편 마르코스 대통령이 죽은 뒤에도 지역을 3번이나 바꿔가며 국회의원에 당선돼 83세인 현재까지 건재하다. 부유층 상원의원으로 마르코스와 대립각을 세웠던 야당지도자 베그니노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나 아들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 현직 아키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보수와 진보의 균형이 무너진 역사의 현장이다. 빈민의 역사는 명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국가보다 개인과 패밀리의 이익에 따라 외국투자와 개발이 이뤄진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와 같은 날 독립했지만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정경유착을 넘어선 정경일치, 자본독재, 지배층만 성장시키는 이상한 정부, 서민들의 최소분배가 횡행하는 것이 이 나라의 경제 현주소다. 10%가 90%를 장악하고 순종과 순응을 강요 중이다.

한국처럼 제조업이 부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필리핀 경제가 비극이다. 손쉬운 부동산과 유통, 외국인 투자의 과실만을 지도층이 따먹는데 골몰하고 있다. 산천과 서민들은 의구하되 지배층과 부자동네는 인신일진하는 사회가 마닐라이다.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은 슬프다. 막노동꾼으로 전세계를 떠도는 필리핀 근로자 소식은 이미 뉴스도 아니다. 글로벌 건설현장 노동자, 가정부 시장의 가장 큰 공급원이다. 1960년대 필리핀은 한국을 원조하는 선진국이었다. 정부청사를 지어주고 기술을 가르쳐 주던 나라였다.

필리핀의 지식인 오르테가씨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110년 전 보니파시오가 정한 방향으로 독립과 혁명이 이뤄졌더라면 지금 우리는 세계의 선진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스페인에 380년, 미국에 50년, 일본에 3년 당한 식민역사의 두께만큼 지나야 이 나라가 제대로 될는지 암담합니다. 부정부패와 냉소주의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부패와 부정을 감시해야 할 시민들의 자포자기입니다. 보니파시오 이후 민중들의 혁명동력이 사라져버렸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언은 비행기가 마닐라 상공으로 날아 오르는 동안에도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