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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보부상 옛길은 살아있다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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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관군에 밀려 힘없이 함락되는 민초들의 깃발 같았다. 다른 이파리들이 다 떨어진 뒤에도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저항하던 마지막 은행잎들의 무수한 추락은 시작되었다. 그 여름 모진 광풍도 견디어 냈지만 한기를 머금은 소슬바람 한 자락에 이리저리 날리는 추풍낙엽이다. 울진에서 출발한 보부상들은 이때쯤 등짐을 지고 봉화로 넘어갔을 것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곳이 없었다.  

갑신년 2월 하순, 정한조가 이끄는 소금상단 일행은 산기슭 가파른 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이들이 넘나드는 십이령길은 울진포구의 염전과 영남내륙의 장터를 잇는 소금과 미역의 길이자 조선경제의 모세혈관이다” (객주. 김주영)  

30대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장돌뱅이 이야기에 몰입한 청송 사람 김주영은 보부상들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5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5년 동안 장터를 순례한 뒤 연재한 소설 객주는 역사에서 찾아낸 보부상의 집대성이다. 객주는 최근 드라마 장사의 신으로 재조명되었다. 주인공 천봉삼은 시대의 사랑과 반목, 정의와 불의가 교차하는 교집합이다. 임오군란 후 조선후기의 상인들의 활동을 기록한 역작이다.  

해안가에서 거둔 소금이며 미역들을 지고 경북 봉화로 넘어가는 십이령길(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봉화군 소천면을 잇는 열 두 고갯길)은 그대로였다. 세월이 지나갔고 시간 따라 생명들의 목숨만이 흩어졌을 뿐. 보부상들의 애환은 과거 그대로 남아있었다. 길 위에 노출된 모진 풍상, 짧은 가을이 가면 곧 눈보라가 치겠지만 황사비 뿌리는 거친 봄을 지나 생선 썩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여름이 돌아 올 것이고, 넘고 또 넘고, 올해 넘고 내년에도 넘을 한 서린 십이령길의 여정. 그 두꺼운 윤회가 내 발밑에서 시작되었다. 


▲ 경북 울진 보부상 주막촌.

▲ 경북 울진 보부상 주막촌에서

나는 천봉삼이 되고자 했다. 불영계곡(봉화-울진)은 자동차로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지만 태백산 줄기 험준한 산맥을 쉽게 넘을 방법은 없다. 굽이굽이 아슬아슬한 고갯길과 오르막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 보부상 걸음으로 3일 거리다. 울진 주막에서 장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로 배를 채우고 나면 부지런히 걸어야 풍찬노숙 사흘 만에 봉화, 영주에 도착한다. 소금팔고 건어물 돌려 다시 생필품을 싸지고 와야 온전한 가장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육로와 수로를 따라 장사를 해오던 여상과 운상, 객주와 보부상은 백성들의 물자조달이나 수송의 동맥이었다. 평화시에는 시장과 시장을 연결하고 동네와 동네를 한 동아리로 묶어주며 물물교환을 바탕으로 유통경제를 이어나갔다. 전란때는 온 나라 소식통 역할에 군량미를 나르고 사발통문을 돌리는 민병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난히 많은 난리에 시달렸던 조선과 일제시대까지. 어느 선비들보다 조선팔도의 고갯길과 골짜기를 훤히 들여다보는 의인들이었기에 어지러운 시절 나라를 위해 싸운 흔적들이 고을마다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 기백과 정신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짚신에 감발치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차고 이고 지고 이장 저장 뛰어가서 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쳐가며 장사하고 해질 무렵 인사하고 돌아서며 다음날 저장에서 다시 보세”(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 울진 십이령길에서 재현된 보부상 행렬.

▲ 울진 십이령길에서 재현된 보부상 행렬.

일생동안 끓임 없이 이동하며 격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들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세간살이며 비단, 가축, 향수, 요강, 유골, 물통, 식칼, 빈데... 바람과 빛의 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예민한 촉각. 적대적 환경과 싸워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 하물며 번뇌와 증오, 분노와 저주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몽골 초원의 노마드처럼 보부상의 거친 삶도 비슷했다. 그들의 애환이 수북이 쌓인 길을 한나절 걸었다. 울진 쪽에서 불영계곡을 타고 내륙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입구까지 곳곳에서 숨이 차올랐다. 길바닥의 돌들은 반들반들하게 닦여 발길의 역사를 가늠케 한다. 그 시절에도 말 타고 글 읽는 대처의 생활은 있었건만 민초 보부상들은 문명의 뒤안길에서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을 팔아 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보부상은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표가 있었다. 뒷면에 새겨진 네가지 규율은 맴버가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었다. ()망언- 거짓말 금지, ()패행-패륜행위 금지, ()음란-음란한 짓 금지, ()도적-도둑질 금지. 어기면 동료들에게 징치를 심하게 당하고 쫓겨나 홀로 떠돌아야 했다.  

그들은 상부상조의 정신을 기반으로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신뢰와 고객존중, 조합원의 동료애와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사상이 뿌리였다. 오늘날의 수탈자본주의나 양극화 경제가 아닌 공존 공생을 지향한 타협경제의 모델이었다. 기업가정신의 근본이었다  

조선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농업이 국가기반인 사회였다. 주류의 괄시와 면박을 이겨내면서 상업의 명맥을 이어온 정신은 예사롭지 않다. 억상정책 속에서 끈질기게 생존한 500년 보부상 스토리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인은 미래를 바꾼다. 은둔과 전란의 지난한 역사를 이겨내고 상인들이 가난한 국가를 이 만큼 부활시켰다. 보부상 정신이 상업보국을 이끌었다. 상인정신과 상업국가의 갈 길을 제시한 경제이데올로기였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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