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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영웅 박영석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5년 12월 02일 오전 9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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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2

 

 

잊혀져 가는 영웅 박영석 

 

 

해발 3천 미터를 넘어서자 두통이 밀려왔다. 발아래 까마득한 계곡으로 흐르는 설산 빙하수는 청회색이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는 사라지고 대지는 점차 낮은 풀들만 남아있다. 하루 8시간씩 이틀 동안 오르고 또 오른 끝에 중간 캠프인 남체 바자르(Namche Bazar. 3420미터)에 도착했다. 롯지 주인은 백년손님 사위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이다. 산 아래 다즐링(Darjeelling. 히말라야 네팔 국경 인도의 세계적 차 생산지)에서 거둔 차(茶)에 야크젖을 섞어 만든 밀크티를 한잔 마시니 살 것 같다.

한숨 돌리고 무심코 돌아본 벽에는 박영석 대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주인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사그라마타(Sagarmatha. 네팔에서 부르는 히말라야)의 영웅 박영석이 자기네 단골이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지상의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너무 가벼이 보았던 탓이었을까. 박영석은 히말라야 최고봉들의 ‘코리안루트’ 를 개척하러 올랐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와 함께 실종된 2명(강기석. 신동민)의 수색작업도 헛되이 끝났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크레바스에 갇혀 그토록 열망하던 설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 할 뿐이다. 산을 사랑하면 언젠가 산이 그를 데려간다는 네팔의 전설처럼 말이다. 인간의 종말은 죽음이다. 시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어차피 영생을 누릴 수는 없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박영석이 안타까운 것은 그의 탐험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꽃처럼 태우다 간 짧은 생애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한국의 아줌마 같은 롯지 여주인 앙 마야(Ang Maya)는 박영석의 그랜드 슬램 사진을 응시하며 처음 만나는 나그네에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이곳에 수십 차례 묵고 갔다는 추억과 함께. 네팔의 세르파들은 히말라야의 동반자들이다. 누구도 이산에 들어서면 그들의 도움 없이 오를 수가 없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신이 보낸 히말라야의 주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박영석은 신화적인 존재였다. 고산에 뛰어난 적응력을 안고 태어났지만 박영석의 투혼을 따라 갈수는 없었다.

 

            
                 ▲안나푸르나 박영석 추모비           ▲생전의 탐험대장 박영석

 

라인홀트 매스너(오스트리아 산악인. 히말라야 14좌 등정)나 예지 쿠쿠츠카(폴란드 산악인. 14좌 완등. 1989년 낭가파르바트에서 추락사망)라는 걸출한 알피니스트들과 비교해 봐도 박영석은 우뚝하다.

박영석은 역사상 히말라야 8천 미터 14좌와 지구의 7대륙 꼭짓점을 정복한 주인공으로 가장 먼저 꼽힌다. 14좌의 주인공들은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와 K2(8611), 칸첸중가(8586), 로체(8516), 마칼루(8463), 초오유(8201), 다올라기리(8167), 마나슬루(8163), 낭가파르바트(8125), 안나푸르나(8091), 가셔브룸1(8068), 브로드피크(8047), 시샤팡마(8046), 갸셔브롬2(8035)다. 9개는 네팔에 솟아있고 K2 등 5개는 파키스탄의 카라코룸 산맥에 감춰져 있다.

7대륙 최고봉은 아시아의 에베레스트(8848)를 비롯해 유럽의 엘부르즈(5642), 북미의 맥킨리(6149), 남미 아콩카과(6959),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 오세아니아의 칼스텐스 피라미드(4884), 그리고 남극의 빈슨 매시프(4897)다. 이 모두를 정복하고 북극점까지 단시간 내에 밞아본 탐험가는 박영석이 유일하다. 2011년의 그랜드 슬램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다. 미디어들은 그때의 쾌거를 세계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석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내친김에 히말라야 최고봉 14좌 코리안 루트 창조에 나섰다. 남들이 가지 않는 미지의 코스에 새롭게 루트를 개설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었다. 위대한 집념이 불타올랐던 것일까. 먼저 로체의 악명 높은 남벽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그만의 ‘박스루트(Park's Route)'를 완성하고 연달아 안나푸르나 서벽에 도전했다. 그러나 신은 그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거칠게 추진했던 파워박의 야망은 여기가 끝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놀라운 가능성을 모든 이들에게 선사하고 그는 설산에 졌다.


          
               ▲남체에서 타메 계곡으로. 필자와 구자준 회장 (중) 이광진 아사히인베스트 회장 (우)

 

박영석의 신화 뒤에는 구자준(한국배구연맹 총재. 전 LIG 손해보험 회장)이 있었다. 수색대를 파견해 시체라도 찾아내라고 오열하던 그는 이인정(대한산악연명 회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장례식을 주도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그 또한 박영석과 따로 또 같이 수 십 차례 에베레스트를 찾은 고산 마니아다. “히말라야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다. 하지만 네팔사람들의 순박함과 산이 주는 놀라운 치유력은 다음해에도 다시 나를 이곳으로 향하게 한다” 고 털어놓았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닮은 세르파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면 어느덧 서울의 일상에서 얽혔던 현실의 고뇌들이 말끔히 사라진단다. 벌써 15년째 매년 한 두 번씩 네팔을 찾고 있다.

구자준은 원래 산악인이 아니었다. 이른바 재벌그룹의 로열패밀리로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영석과의 인연이 그를 히말라야로 이끌었다.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낙천적 스타일과 포근함은 어느덧 그를 프로 산악인들의 큰 형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박영석의 그랜드 슬램을 적극 후원한 그의 공로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전의 가장 어려운 길은 3대 패스다. 구자준은 작년에 이 3대패스 (고쿄패스, 콩마라 패스, 렌조 패스)를 주파하고 주저앉아 헬기에 실려 내려왔다. 따뜻한 후원자로 시작해 직접 사그라마타를 누비는 산악인이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이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구자준은 위대한 영웅 한사람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기록에 도전하는 박영석의 정신적 대부역할까지 도맡았던 서로의 아름다운 관계는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렸다.

 

          
              ▲산악인들의 요람 남체 바자르              ▲에베레스트의 위용

 

상대적으로 박영석의 기억은 국내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세태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남체 바자르의 황량한 산 중턱 롯지의 밤은 어둡고 길다. 그래서 추위와 피로에 지친 산악인들이 초저녁 레스토랑에 가득히 모여든다. 유럽인이 가장 많고 미국과 호주, 브라질 사람들까지 자리가 없을 정도다. 그들에게 위대한 한국인 박영석은 오늘도 영감을 주고 있다.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한 영혼이 히말라야에 부활해 오늘도 도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영생을 가르쳐주고 있다.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박영석은 살아서 영웅이요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히말라야 원정 사흘째 새벽 찾아온 고소공포증(고산에서 산소부족으로 오는 두통과 구토증세)을 견디면서 문득 별처럼 살다간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의 고백이 떠올랐다. “산은 정복하기위해 오르는 것도 영웅이 되기 위해 오르는 것도 아니다. 설산을 오르는 두려움을 통해 이 세계를 좀 더 새롭게 알고 싶을 뿐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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