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청산도 풀 무덤 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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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청산도 풀 무덤 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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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찬란했고, 때로는 분노로 어두웠고, 때로는 외로웠을 한 생애가 조용히 풀밭에 누워있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하늘과 지나가는 바람을 벗 삼아 사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육신은 스러져 사라지고 남은 뼈대에 머물던 영혼마저 떠나려 한다. 용머리 볏짚 이고 다시 봄이 찾아왔지만 초분(草墳)의 망자는 말이 없었다.

초분 아래로 펼쳐지는 청산도 해변은 차라리 한 폭의 파스텔 명화였다. 수평선에 깔린 굴 양식장들의 기하학적 무늬가 선명했다. 왜구들의 침입으로 초토화되었던 피내리고랑과 범 바위 오름길이 멀리서 가물거렸다. 섬마을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완도 항에서 배로 한참을 달려와 만난 땅이다.

육지와 분리된 외로운 땅에서 누군가 죽으면 섬사람들은 근처에 풀 무덤을 만들었다. 주검을 땅에 묻지 않고 입관한 뒤 돌 축대나 통나무 위에 올려두고 이엉(짚으로 만든 지붕)을 덮어뒀다. 초가지붕 얹듯이 용마름을 올리고 엮어 매었다. 사방으로 새끼줄 끝에 돌을 묶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했다. 주변은 소나무가지 울타리를 둘러 짐승의 접근을 막았다.

주검을 임시 안치하는 빈장(殯葬)은 고대부터 있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흔한 풍습이었다. 정부가 위생법으로 제한하고 초빈(草殯) 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점차 사라졌다. 초분(草墳)은 관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만든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통적인 조상숭배와 관련이 깊다. 사후에도 살아계시는 부모님처럼 정성스럽게 돌봐야 한다고 믿었다.

 

▲초분은 언덕이나 양지바른곳에 만든다.
▲초분은 언덕이나 양지바른곳에 만든다.

풀 무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금지령이 떨어져 뜸해지기 시작했다. 서남해안의 바닷가 마을에서만 일부 유지되었다. 전라남도 완도의 청산도, 여수 금오도안도개도, 고흥 나로도, 신안 증도도초도비금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례문화다. 전라북도 영광 송이도, 군산 무녀도, 부안 계화도 등 에서 초분 풍습이 지켜진 것은 특이한 대목이다.

초분은 씻김굿이나 무속의 사령제(死靈祭)와 복합된 전통이다. 넓게는 태평양을 둘러싼 폴리네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온 전통이다. 해안지방의 무속과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지역을 막론하고 남은 뼈(유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본장(本葬)을 치르기 전에 오랫동안 관리해야 하는 초분은 번거롭다. 해마다 이엉을 갈아줘야 한다. 초가지붕을 바꿔주는 정성으로 관리한 것이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초분은 3년 정도 지난 뒤 살이 썩어 없어지면 뼈만 골라 다시 땅에 묻는다.

풍장이나 조장과는 같은 듯 다르다. 몽골에서 보았던 풍장이나 사막의 조장은 그 자체로 주검을 처리하는 완결된 의례다. 초분은 본장에 앞서 치르는 일차장(一次葬)이다. 옛사람들은 죽은 육신을 그대로 묻으면 땅이 오염된다고 생각했다. 혼탁한 육신이 깨끗이 제거된 뒤 치르는 세골장(洗骨葬)의 성격이 짙다.

 

▲청산도 초분 앞에서
▲청산도 초분 앞에서

풀밭에 나란히 누운 두 개의 초분 옆에서 나는 죽은 자의 시선으로 한동안 멀리 수평선을 응시했다. 봄은 이미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이파리들이 피는 소리며, 청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며, 만상이 하늘을 향해 일어서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고요 속으로 날아오르는 영생의 소리까지 한 데 어울려 봄날은 분주했다. 알맞은 농도의 햇빛이 섬 기슭의 반나절을 수놓고 있었다. 인생은 짧은 순례길이다. 나는 신앙이 깊지 않지만 종교적 생의 찬미를 찬미한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들의 꽃, 피었다 사라져가는 것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떠나리라. (순례자의 노래)

 

섬 마을에서 해풍과 한 평생을 보낸 망자는 상여를 타고 이곳에 왔을 것이다. 장송곡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어깨에 실려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 언덕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육신을 바로 땅속에 묻는 것은 매정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지상에 두고자 했던 마음의 표시였다. 탈육 이후 비로소 죽음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과정을 지켜왔다. 지상에서 이 과정을 거쳐야 뼈가 검게 되지 않고 숭고한 흰색을 유지한다는 믿음이었다.

 

▲청산도 서편제 길
▲청산도 서편제 길

유채꽃이 피기 시작한 언덕 들판은 고요했다. 잊을 수 없는 영화 '서편제'에서 남녀 두 주인공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넘던 청산도 유채꽃 밭이 눈앞에 가득했다. 오래전부터 걷고 싶었던 동화 같은 길이다. 구부러진 돌담 사이 황톳길을 타고 서로 비켜가는 계절의 인사가 정중하다. 신화 같은 풍경 너머로 번져가는 춘풍의 기운은 왕성했다. 번뇌의 막연한 사선을 따라 먼 시원이 아득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이 푸대접 하거든 잎에서 자고 가자.

 

나 또한 이런 심정이었다. 나비가 청산을 날 듯 삶의 흐름 따라 바람이 이끄는 대로, 꽃이 허락하는 대로, 머물다 가는 것이 세상일 아니겠는가. 작자도 알 수 없는 옛 시 한 구절에 마음을 주고 나니 생의 미련에 대한 무게가 훨씬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한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다. 초분을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내려와 선착장으로 향했다. 존재만으로 찬란한 봄꽃, 머지않아 다가올 짧은 낙화.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침내 어느 날인가 아무런 욕망도 이별도 없는 무욕의 세계로 침잠할지라도. 포말을 일으키며 멀어져 가는 뱃전에서 재회의 기약 없는 청산도 푸른 산하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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