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는 언제나 노스텔지어다. 끊을 수 없는 그리움과 위안의 대상이다. 불우했던 시대의 예술가들에게는 특히 그랬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화가 에곤 실레(Egon Shele.1890-1918)는 어머니(가틴 마리 실레)의 고향마을을 자주 찾았다. 체코 남쪽의 중세도시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의 정신적 피난처였다.
불타바 강 위에 떠있는 한 송이 장미 같은 소도시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중세풍 크림색 기와지붕 배열은 공중에서 보는 한 폭의 명화였다. 소박한 거리와 붉은 지붕들이 강변 안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화는 비교불가 풍경이다. 하지만 호반의 산책길과 오래된 골목에는 체코 특유의 쓸쓸함과 보헤미안 감성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중세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클래식 호텔 '로제' 에 짐을 풀고 나는 곧바로 휘어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육중한 성당건물이 마주 보이는 골목의 에곤 실레 미술관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빗방울이 오가는 분위기에 마음까지 가라앉은 오후였다. 우울하게 세상을 등진 실레의 그림에 어울리는 날씨다. 요절한 청년화가를 대하는 나의 내면의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살의 화가 실레는 이곳에서 걷고 사색했다. 드로잉과 판화를 만들고 풍경화를 그렸다. 말발굽처럼 돌아 나오는 강의 물줄기를 경계선으로 섬처럼 보이는 구시가지는 특히 매력적인 지형이었다.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체스키 크룸로프 정경은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에곤 실레를 기리는 갤러리는 오래전부터 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실레의 그림이 제대로 평가를 받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의 죽음 한 참 뒤였다. 소더비 경매(2011)에서 420억 원에 팔린 '빨래가 널린 집' 이나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 풍경' 등은 청년시절 이곳에서 그려진 걸작들이다.
에곤 실레의 풍경화에는 밝은 색감보다 어둡고 음울한 색채가 많다. 특유의 왜곡된 묘사들이 풍경화를 지배한다. 건물들이 뒤엉켜져 있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보다는 시들거나 저물어가는 식물, 환하게 떠 있는 태양보다는 지는 해의 모습이 많다.
그의 일생을 그려낸 영화, '에곤 실레-욕망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잔잔하고 목이 메어온다. 힐데 베르거의 소설 '죽음과 소녀-에곤 실레와 여자들'을 원작으로 한 필름이다. 요절한 천재 예술가의 삶 전반이 담겨있다. 그림그리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4명의 여인은 영혼을 적셔주는 수분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와의 만남과 작업에 대한 고뇌도 담겨있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실레가 친구 안톤 페슈카에게 남긴 말이다.
"내가 왜 어머니가 살던 곳을 찾아 헤매고 굳이 쓰라린 마음을 끄집어내는지 아무도 이해 못할 거야. 조금의 기억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내 안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고 나는 그 모습들을 붙잡고 싶은 거야".
실레는 아내 에디트를 만나 아이들을 낳고 잠깐 행복했다. 그 시기 그림들은 평화롭다. 가정을 꾸렸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 그는 늘 불안과 방황에 내몰렸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으로 두 아이와 아내를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절망과 고독, 불안 속으로 재진입하고 말았다. 그림에 나타나는 그의 붓 터치는 설명하기 힘든 내면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실레의 그림은 역시 '열매가 있는 자화상' 이다. 에곤 실레를 상징하는 명작이다. 나는 이 그림에 이끌려 체스키 크룸로프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을 담은 화폭에는 실레의 독특한 생각과 분위기가 담겨있다. 죽기 전 친구에게 남긴 편지 한 구절이다.
"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데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마음 깊은 저 심연에 자리한 영혼의 울림소리가 없다.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고독과 우수의 심정을 그리고 싶었다."
또 다른 작품 '시들어 버린 해바라기'는 살집이 말라버린 노인처럼 보였다. '가을나무 1' 은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한 사람이 연상되었다. 그에게 자연은 소외된 소수를 표현하는 매개체였다.
에곤 실레의 그림들을 돌아보고 눈에 넣는 동안 파리의 회색빛 가을날을 노래했던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의 '가을 노래'가 오버랩되어 나를 따라 다녔다.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속에 잠기리라.
잘 가라, 너무나 짧았던 우리네 여름날의 생생한 빛들이여"

실레의 야외그림 '네 그루의 나무들'은 특별하다. 스산한 가을하늘 아래 핏기 없는 햇빛이 가느다란 온기로 남아있다. 벌판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네 그루의 나무들. 잎을 지상으로 낙하시킨 앙상한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온다. 아직 단풍이 남아있는 세 그루와 대조적이다.
죽음 1년 전쯤 그려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초판 표지에 장식되었던 그림이다. 소설 주인공 영혜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것처럼 모든 나무들은 견고하게 서있었다. 가방을 메고 의자를 밀어 넣고 영혜는 일어난다. 이미 굳어진 몸은 여전히 딱딱한 정신병동 침대에 누워있는데 영혼만의 외출이다.
벌써 100년 전에 네 그루의 나무를 그려주고 떠난 불행한 화가를 '채식주의자' 가 만났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 강력한 선으로 고독이나 욕망 또는 그 이상의 것들을 표현했다. 실레의 그림과 한강의 소설은 동행이 되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잉태한 감정의 교집합이었다. 우연처럼 보이는 예정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체의 뒤틀림이나 변형을 통해 인간욕망과 성욕, 질투, 불안, 원초적인 심리의 근원적 실마리를 찾아 나선 실레의 그림여행은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은 전쟁의 시대였다. 징집을 강요당하고 전선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세상이었다. 그 험한 질곡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책이나 안도감이 생의 키워드였다.
실레의 인생은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었다. 살았더라면 일상이고 견뎠더라면 고통인 28살 인생의 비망록이었다. 목숨은 가속기 안에서 어느 쪽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 뒤섞여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죽음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고 역사로 남았다. 생의 파멸은 놀랍도록 고요하다. 영원한 침묵으로의 진입이다.
예술계가 아직까지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림 속 인간의 모습들이 지금의 우리와 적나라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무대만 다를 뿐 불안과 슬픔, 좌절로 범벅된 인간 군상들이 실레의 화폭에 채워져 있다.
공포에 떠는 인간의 내면과 성적 욕망은 초라하게 벌거벗겨진 육체에 모두 담겼다. 강렬한 시선의 자화상과 성(性)이라는 금기를 노골적으로 다룬 것은 기절할만한 시대적 사건이었다. 사랑에 건조한 어머니, 매독으로 죽은 아버지의 기억이 유년기 우울한 그림자로 남아있었던 까닭이다.
에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제자였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고통, 불안, 노골적 성의 묘사, 죽음, 절망들이 어른거리는 강렬한 화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컬렉터는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다. 예술사를 관통하는 스토리다. 루돌프 레오폴트(1925-2019)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수집가였다. 자립도 힘든 청년시절(1953), 그는 자동차 한 대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주고 에곤 실레의 '은둔자들' 이라는 그림을 손에 넣었다. 공부엔 관심이 없이 경매장과 미술품 매매 골목을 돌아다니는 의대생 아들의 마음을 바꿔보려는 부모의 졸업선물이었다.
실레의 남겨진 그림들은 망측한 나체이거나 우울함과 불안함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괴짜 수집가(28세)가 발견해낸 괴짜 화가(28세 죽음)와의 만남이었다. 안과 의사 레오폴트는 2차 대전 후 에곤 실레의 작품에 더욱 심취했다. 외설적 화가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잊혀져가던 유품들을 수소문하고 작품 소유자를 찾아다녔다. 실레 컬렉션 220점은 이렇게 한 곳에 자리했다.
레오폴트 미술관은 빈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하얀 석회암으로 치장된 외부 정육면체 모양의 개성 넘치는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볼거리다. 문화의 시대가 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었을까. 대단한 혜안이고 집념이었다.

나는 에곤 실레의 인생이 윤형방황(輪形彷徨)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길을 잃고 해매이다 돌아오는 지점은 결국 처음 방황을 시작한 그 곳이라는 심리학적 관찰. 눈을 가리거나 사막에서 똑같은 길을 걸으면 겪는 현상이다. 실레의 윤형방황 종점은 어머니의 고향마을 체스키 크룸로프였다.
천재화가는 세상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너무 일찍 세상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언제나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도록 고요한 가운데 자리를 비워 두는 것.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영원의 이치를 깨달으면 더 너그러워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시간에 도달하기도 전 이미 다른 선택에 영혼을 맡겨 버렸다. 화톳불처럼 덧없이 타올랐다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무지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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