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죽음의 맛, 시모노세키 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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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죽음의 맛, 시모노세키 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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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복어 전문점 '기타가와' 는 6대째 내려오는 이름난 노포(시니세)다. 1892년 개업한 이래 130년이 넘었다, 규슈의 모지에서 3대를 이어오다가 4대 째에 건너편 시모노세키로 이전 했다. 엣 된 얼굴의 청년 기타가와 고지는 상기된 표정으로 손님을 맞았다. 아직 수줍음과 풋풋함이 혼합된 미소가 싱그럽다. 하지만 26살 사장님 치고는 당차고 적극적이다.

오이타대학(규슈 오이타 현 소재)에서 경제학을 마치고 바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학교에 갔기 때문에 전혀 후회가 없다고 한다. 시모노세키에서 오이타는 멀다. 간몬대교를 타고 건너 두어 시간을 달려야 갈수 있는 거리다. 가족의 성씨를 모태로 만들어진 '기타가와' 는 오늘도 성업 중이다. 메이지시대와 전쟁의 굴곡, 근대를 지나 숱한 역사를 지나왔다. 복어요리점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통하는 곳이다.

 

▲시모노세키 복집 기타가와의 젊은 고지 사장과
▲시모노세키 복집 기타가와의 젊은 고지 사장과

후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요리다. 기타가와는 소문대로 복사시미가 일품이었다. 굴곡진 독특한 칼(후구히키)끝에서 한 점씩 발라지는 얇은 사시미는 예술이다. 문양이 화려한 접시에 펼쳐진 살점들은 차라리 아라베스크 무늬에 가까웠다. 이어지는 복 껍질 무침은 어떤가. 사시미로 상큼해진 입속에 색다른 촉감을 접목시키는 의식이다.

귀여운 복어 새끼 두 마리가 통째로 알맞게 튀겨져 올라왔다. 정신없이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후구노고노가츠케' 가 눈 앞에 등장했다. 복어 알을 10년 동안 삭혀낸 진미다. 독성이 제거되고 다져진 알들은 두꺼운 층으로 압착되어 두부처럼 정갈하게 제 몸을 맡겨왔다. 그 식감이란 묘사불가다. 두툼한 복어 살을 함께 넣어 지은 솥 밥이며, 복어 어묵, 복어초회를 먹다가 함포고복(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 이제 그만 달라고 항복을 선언했다.

현해탄(玄海灘) 복어는 일품이다. 차가운 바다, 빠른 물길과 거친 파도의 대명사 현해탄은 역사시대 이후 인간에게 한 번도 제압당하지 않았던 곳이다. 바다의 고집을 꺾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 선박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다. 말 그대로 이 검은 바다에서 몸부림치다 올라온 복어는 육질이 단단할 수밖에 없다. 특유의 쫄깃쫄깃하고 압도적인 식감의 비밀이다. 사시미를 목으로 삼킨 뒤 입안에 고이는 미세한 단맛이 긴 여운을 남겼다. 현해탄 복어는 최고의 맛으로 시대를 관통했다.

규슈는 한반도 끝과 현해탄 바다가 만들어내는 천혜의 땅이다. 나카사키 일대와 오이타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복어는 대부분 이곳 시모노세키로 몰린다. 일본 열도 전국의 유통을 위해서다. 항구에서 동해로 나가면 한국이고 세토내해로 나서면 일본 본토다. 시모노세키의 가라토 어시장이 100년 이상 최고의 명소가 된 것은 순전히 현해탄의 복어 덕분이다.

 

▲시모노세키 가라토 어시장의 복어 상
▲시모노세키 가라토 어시장의 복어 상

기타가와는 작고한 아베 전 수상 부부의 단골집이었다. 이곳이 지역구인 그는 주말마다 들러 도라후구 사시미를 즐겨 먹었다.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정치가업을 물려받은 아베의 본거지였다. 시모노세키를 복어의 성지로 만든 것은 우리가 잘 기억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역할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집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지한 군졸들은 복어로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히데요시는 복어금식령(1592)을 내렸다. 메이지유신 정부에서 총리자리에 오른 이토는 시모노세키 슌판루(春帆樓)에서 복어요리를 대접받고 기막힌 맛에 반해 300년 만(1892)에 금식령을 풀었다. 유신의 고장 조슈(현재 야마구치)의 경제도 살릴 겸 독성제거를 전제로 복요리의 전국 유통을 지원했다. 맛 집 기타가와가 개업한 해이기도 하다.

이 바람에 시모노세키 향토음식 복어는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도 즐겨먹는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조슈 출신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토 에이사쿠 수상, 기시 노부스케 등 최고의 정객들이 기타가와의 단골들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시모노세키 바닷가 복 집 '슌판루' 에 마주앉아 전후처리를 논의했다. 복어금식령이 풀릴 수밖에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복은 고급요리의 상단을 차지했다.

 

▲기타가와 복집의 도라후구 그림과 단골손님 아베 전 수상의 모습
▲기타가와 복집의 도라후구 그림과 단골손님 아베 전 수상의 모습

도라후구(虎河豚)는 복어 등에 박힌 무늬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언뜻 보면 호랑이 얼룩무늬와 비슷하다. 일본인들에게는 '자주복' 으로 더 익숙하다. 참복 중에서도 맛이 좋은 상품이다. 기타가와 연회장 벽에는 도라후구 무리가 현해탄을 유영하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통통한 복어들이 마치 어뢰의 모습 같았다. 실제로 2차 대전 말기 군국주의자들은 '회천(回天. 가이텐)' 이라는 이름의 자살특공대를 운영했다. 복어처럼 생긴 어뢰를 타고 미 군함으로 돌진하는 만행을 장려했다.

다카스키 신사쿠가 하늘의 뜻을 돌려 혁명(유신)을 완성시켰다는 '회천' 의 스토리가 엉뚱한 군국충성 도구로 사용되었다. 순진한 젊은 청년들을 수없이 바다에 수장시킨 역사의 어두운 단상이다. 하루 전 나는 메이지 유신의 본거지 하기와 야마구치를 돌면서 이고장의 영웅 신사쿠의 일생을 돌아봤다. 그 회천의 복어가 어뢰처럼 거친 물살을 가르다가 드디어는 밥상의 귀공자로 올랐으니 세상의 아이러니다.

바람은 시모노세키와 규슈를 잇는 간몬대교 밑으로 쉬지 않고 몰아 닥쳤다. 좁은 틈(9백 미터)의 해협은 이제 터널로 연결되었다. 가로 놓인 바다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아무 때나 자유롭게 오고가는 브릿지로 변모한 셈이다. "모지(규슈)에서 광어 먹고 시모노세키(혼슈)에서 복어로 입가심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갈라진 땅은 다리와 지하로 상통하고 있었다.

 

▲간몬대교의 차가운 바람은 후구(복)의 맛을 낸다.
▲간몬대교의 차가운 바람은 후구(복)의 맛을 낸다.

"복어는 죽음과도 맞바꾸는 맛". 시인 소동파의 묘사가 아찔하다. 맹독에도 불구하고 먹어야 하는 식도락가들의 심리가 기막히게 녹아있다. 동양3국의 공통된 서사다. 실제 복어의 독(테트로도톡신)은 청산가리의 5배 이상 치명적이다. 한 마리에서 빼낸 독으로 성인 33명을 치사시킬 정도라니 공포감마저 든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복어에 희생되었다. 독을 제거하고 안전한 먹 거리가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남해안 양식장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도라후구는 독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에게 복어는 '뎃포(철포)' 다. 맞으면 죽음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독에 당하고 나면 몸이 지릿지릿 해져 대장군으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죽기는 싫지만 먹고는 싶다", "뎃포(복어)는 먹어도 바보, 안 먹어도 바보". 기막힌 복어 맛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수사다.

사랑에 실패해 복어를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주인공의 독백(조경란 의 소설. '복어')이 가슴에 사무친다. 조각가 여성과 건축가 남성사이의 스토리, 죽으려는 여자와 살리려는 남자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그 밤에 복어의 뼈가 말했어.

온몸으로 밀고 가야만 하는 삶이 있다고.

 

복어의 눈이 말했어.

소중한 것이 사라지기 전에 똑바로 봐야 할 것이 있다고.

 

그리고 나는 눈을 떴어.

내가 눈을 떴을 때 본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기다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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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동 2024-04-11 08:00:38
시모노세키 복어집 '기타가와' !

6대째 이름난 노포로 깊은 맛이었지만
위 글을 읽고 보니
다시 감칠 맛이 도는 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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