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을 조금 넘는 한국의 근.현대 기업사는 20세기 초반부터 한반도에 몰아닥친 정치, 사회의 격변과 궤를 같이하며 무수한 기업과 기업인의 명멸로 점철됐다.
이 가운데 최고의 경영자와 기업이 어디인지를 꼽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인물마다 기업마다 그 존재의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72년 전 삼성그룹의 토대를 놓은 고(故) 호암 이병철이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우뚝 솟았던 경영자의 반열에 올라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오는 12일은 이병철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이병철이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차렸던 250평 남짓한 가게는 그가 세상을 뜬 1987년에 37개 계열사에 연매출 14조원 규모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삼성그룹은 200조원이 넘는 연간매출에 30만명 가까운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커졌다.
또 삼성에서 분가한 CJ와 신세계는 각각 재계 20위권에, 한솔은 중견그룹 자리에 포진하고 있다.

◇'경술국치'의 해 태어나 일제 말기 창업 = 한 때 본명보다 성공한 사업가의 상징으로, '돈병철'이란 별칭으로 인구에 회자되던 호암은 1910년 2월12일 현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그해 8월27일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으니 호암 탄생 100주년은 곧 국권침탈 100주년이기도 하다.
호암은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다가 12살이 되어서야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어 서울 수송보통학교, 중동중학교, 일본 와세다대학을 거쳤으나 어느 곳에서도 학업을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26세 때 경남 마산에서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당시 돈 1만원씩을 출자해 협동정미소를 세운 것이 사업의 시초가 됐다.
한 때 정미소 외에 운수업체까지 거느리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청년 사업가 이병철은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로 금융기관 자금줄이 막히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러다가 28세 되던 1938년 3월1일 대구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차리고 무역업에 뛰어들어 재기에 나섰다.
삼성상회는 농산물과 건어물 등을 중국, 만주 등지로 수출하는 무역회사이자, 국수와 청과 등을 파는 내수 유통업을 겸한 회사였다.
삼성의 발상지인 이곳에는 현재 '삼성상회 터'라는 소공원이 조성돼 있다.

청년 이병철은 삼성상회 시절에 대학 친구이자 해방 후 좌익운동에 투신했던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기용하고 큰 성과를 내면서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라는 인사원칙을 세우게 된다.
의심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경영철학이다.
◇40대에 무역, 제조업에 은행까지..'그룹' 체제 구축 = 영남상권을 주무대로 하던 이병철은 1948년 11월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창립하는 것으로 사업의 2막을 올렸다.
오징어와 한천을 수출하고 면사 등 원자재 등을 수입하던 삼성물산공사는 창업 1년 반 만에 무역업계 1위에 오르며 이병철은 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그러나 창업 2년 만에 터진 한국전쟁으로 사업기반을 잃는 등 다시 한 번 좌절을 겪게 된다.
이병철이 전쟁 중 빼앗긴 미제 시보레 승용차를 한 때 북한의 2인자였다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박헌영이 이용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1.4 후퇴 당시 부산으로 가서 대구 양조장 직원들이 축적한 3억원의 자금으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이병철은 부산에서의 사업이 번창한 덕에 제조업체인 제일제당을 설립해 2년 만에 '거부'의 반열에 들었고, 이어 제일모직을 설립하는 등 오늘날 삼성그룹의 밑그림을 그렸다.
1950년대 후반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흥업은행(이후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의 지배주주 지분을 획득해 업계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50대의 호암, 반복되는 영욕 = 1960년대 50줄에 접어든 이병철은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수차례에 걸친 시련을 겪는 등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 제일의 거부로 떠오른 그는 1960년 4.19혁명 뒤 전 계열사가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그해 7월 난생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일본 도쿄(東京) 체류 중 5.16 쿠데타가 터지면서 다시 한 번 부정축재자로 몰려 100억환이 넘는 추징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병철은 이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나 경제인들에게 벌금 대신 공장을 건설하게 하고 주식을 정부에 기부하는 방안을 제의해 성사시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런 인연 덕분에 정부의 요청으로 부정축재자로 구속됐던 12명의 기업인과 함께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 일생의 단 한 번인 대외직을 맡게 된다.
1960년대 군사정부의 '경제 제일주의'에 힘입어 이병철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지만, 다시 한번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바로 '한비 사건'이다.
자유당 정부 말기부터 비료사업을 눈여겨보던 호암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당시 정부의 지원과 일본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규모인 연산 33만t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면서 사카린의 원료가 되는 OTSA를 밀수입했다는 논란이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해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삼성이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평전인 '담담여수(淡淡如水)'는 이 사건을 '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곡절 속에서도 1960년대에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을 인수해 업역을 계속 넓혔고 1969년에는 마침내 오늘의 삼성을 지탱하는 기둥인 전자사업에 뛰어들었다.

1969년 설립한 삼성전자는 창립 9년 만인 1978년 흑백TV 수상기를 200만대 생산해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고 우리나라를 세계 세 번째로 VTR을 자체 개발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병철은 1982년 21년 만의 미국 방문 중에 전자혁명의 가능성을 엿보고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모든 준비를 거쳐 반도체사업 투자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1983년 3월은 그가 만 73세 되던 해였다.
애초의 우려와 달리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쑥쑥 뻗어나갔다.
충분한 사업준비와 정부의 지원, 재미 반도체 전문인력들의 도움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삼성이 1984년 64K D램을 양산한 데 이어 256K D램 등 차세대 반도체의 잇단 개발에 성공하자 재계는 다시 한 번 이병철의 혜안에 감탄했다.
호암은 반도체 사업 시작을 발표한 뒤 4년 만에 세상을 떴지만,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2010년 현재 연간 20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삼성의 젖줄이자 대표사업으로 성장해 있다.
하지만 그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하고 1987년 11월19일 폐암으로 이태원동 자택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이병철에 대한 평가에서도 공과가 공존하지만, 인재확보에 대한 그의 열정을 놓고는 다른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의 묘비에 "'자기보다 현명한 인재를 모아들이고자 노력했던 사나이가 여기 잠들다'는 글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숨을 거둔 뒤 재계에서 수위자리를 놓고 평생을 겨뤘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호암은 사업이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분"이라며 "흔히 삼성 사관학교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인재에 대한 호암의 열정은 기업사에 하나의 기업문화를 일궈냈다"고 평했다.
한평생을 기업가로 산 이병철에게는 '천부적 기업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잭 웰치 제너럴 일렉트릭(GE) 전 회장은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네 가지는 책임감과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능력, 올바른 비전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회장은 그 네 가지를 고루 갖춘 경영자"라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