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자본시장의 과거와 현재…서울·인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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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자본시장의 과거와 현재…서울·인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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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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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타임스 김지훈 기자] 여행을 좋아하는 금융 기자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자본시장의 역사를 길 위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열광했던 어느 만화 속 주인공이 된 마냥 한국거래소 학예사가 직접 선별해 전국 14곳으로 내던진 구슬을 찾아 헤매고 왔다고 할까. 이는 3박 4일간의 자본시장 역사탐방이자 12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기도 하다. 땡볕과 폭우에 몸은 지쳤을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처럼 설레고 열정적이었다. 희비가 교차했던 자본시장의 역사를 리와인더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편집자주>

지난 시간 경성주식현물취인소, 대한증권주식회사, 한국거래소를 돌아보며 한국의 자본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훑었다면 이번 시간은 코스닥 증권시장을 알아보는 것으로 자본시장 역사 여행을 시작해보자.

먼저 코스닥 증권시장의 경우 1996년 첨단 기술주 중심인 미국의 나스닥(NASDAQ) 시장을 본떠 만든 한국의 주식시장으로 유가증권시장(코스피)과는 별개의 시장이다. 코스닥은 상장 조건을 완화해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고 투자자들의 안전한 투자를 보장하기 위해 거래소 시장과 별도로 개설됐다.

중소기업이나 신생 벤처기업은 유가증권시장의 문턱이 너무 높고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탈락할 확률이 높아 이들 기업만을 위한 시장을 하나 더 만들어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2005년 한국증권선물거래소(KRX) 출범 이후에는 독자 시장에서 벗어나 KRX 산하 코스닥 시장본부에 소속된 시장이 됐다.

(왼쪽) 과거 코스닥증권주식회사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왼쪽) 과거 코스닥증권주식회사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코스닥 시장의 본고장은 여의도다. 현재 금융투자협회가 자리한 곳에 코스닥증권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지금 이 자리의 주인인 금융투자협회는 금융투자산업과 자본시장의 선진화, 회원 상호 간의 업무질서 유지, 투자자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코스닥 증권시장이 위치한 여의도는 조선시대까지 노비들이 많이 살았으며 목축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돌을 놓고 평지작업을 통해 1916년 간이비행장을 건설한다. 이는 한국 최초의 비행장이 된다. 여의도의 아이덴티티는 공항이었고 이후 김포공항을 국제공항으로 사용하면서 여의도 공항은 대체공항이 된다.

시간이 흘러 여의도는 공항으로서 기능을 잃게 되고 김수근 건축가를 중심으로 1967년 본격적으로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워 점점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초고층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현재 여의도는 한국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왼쪽) 과거 경성방직주식회사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왼쪽) 과거 경성방직주식회사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다음 행선지는 여의도를 빠져나와 영등포로 향한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고 불나방처럼 사람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영등포 타임스퀘어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고 과거 사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섬유를 만드느라 분주한 아낙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장소는 경성방직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다.

해당 회사는 근대적인 기업 활동에 관심이 있던 일부 대지주들이 기업에 투자하는 데 영향을 줬고 무엇보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개소 당시 최초로 상장한 기업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상장 1호다.

상장 1호 이상으로 이 회사가 중요한 이유는 아픈 역사에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인 자산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아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계 기업이기 때문이다. 국내 면방직업계 대기업 중 한국인이 경영한 유일한 기업이기도 했다.

민족정서를 경영자원으로 적극 활용해 일본 면방직 대자본이 국내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후발 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성장을 거듭했고 만주에 자본금 1000만원의 남만방적을 자회사로 거느린 굴지의 대기업이 된다. 현재는 ㈜경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한국 섬유 산업계에서 중견 기업의 위상을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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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어두운 도로를 밝힌 늦은 시간, 서울을 벗어나 장거리 여행을 나선다. 이번에 방문할 곳은 인천광역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현물거래시장(1896년)이 개설된 곳인 인천미두취인소이다.

어쩌면 이곳은 한국 자본시장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자본시장 역사를 이해하는 데 생성 과정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개항장이 위치해 있었고 포문이 열리면서 쌀 반출이 일어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쌀 수출입이 쉬웠기에 1896년에 국내 최초 미두취인소(현재의 증권거래소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으로 각종 투기현상이 많이 일어났던 곳)인 인천미두취인소가 생기게 된다. 한편으로 취인소는 일제 강점기의 핵심 수탈 기구로 쓰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의 시초 기구로 보는 이유는 있다.

인천미두취인소가 먼저 생기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미두취인소가 생기게 된다. 경성도 마찬가지로 두 개가 통합되면서 조선취인소가 된다. 이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또 대한증권까지 가게 된다. 회원제로 운영을 했으며 쌀과 콩의 미래 가격을 두고 배팅이 이루어졌다. 조금의 증거금이 있으면 참여를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의 선물 거래처럼 원금을 초과하는 손실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미두취인소에도 그런 일들이 발생했고 반면 엄청난 큰 수익을 올린 조선인들도 다수 존재했다고 한다. '미두왕' 반복창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 과거 인천미두취인소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왼쪽) 과거 인천미두취인소 모습. [사진=한국거래소 제공] (오른쪽) 현재 모습. [사진=김지훈 기자]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취인소가 출범한 이후부터는 이곳을 통하지 않은 거래는 법적으로 모두 금지했다. 이때부터 미두거래는 인천에서 하고 주식거래는 경성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군산, 목포, 대구, 부산 등 미두취인시장은 '염시정'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를 허가하게 된다.

인천미두취인소는 현재 KB국민은행이 신포동 출장소로 이 장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건물을 보면 당시와 비슷한 모습을 유지 중이다.

예전과 유사한 역사적 장소들을 만나니 군산, 부산 등도 소환된다. 워낙 과거의 시간을 잘 품고 있는 도시들로 당시의 자본시장의 역사적 장소들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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