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 머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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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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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 1만6000원 / 김영사

[컨슈머타임스 박현정 기자] "나, 눈먼 사람이에요.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사인보드를 들고 선 시각장애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사인보드를 수정해줬더니 갑자기 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너무 멋진 날이에요. 그런데 난 그걸 볼 수가 없어요"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하기만 해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례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장관으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이어령의 여정 중심에 '언어'가 있었다. 이 책은 이어령의 언어에 대한 생각부터 뿌리까지 엿볼 수 있다.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거시기 머시기'를 끼워넣으면 놀랍게도 문장이 완성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저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거시기 머시기'는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다. '거시기 머시기'는 그야말로 이해력과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마법의 언어다.

이 책은 죽음을 통해 생을 말하는 모순과 역설의 미학, 소통 불가능한 세계를 지배하려는 번역의 욕망, 그리고 디지털 시대 집단 기억 장치로서 영원히 남을 책이라는 보물까지 총 여덟 번의 강연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는 것은 책이 하나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 기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픈 과거를 극복하는 힘,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힘은 바로 그 집단 기억에 있음을 강조한다.

지난 2월 저자의 몸은 닫혔지만 동시에 그의 세계는 더 크게 열리고 있다. 이 책은 이어령의 80년 독서와 글쓰기 인생에서 길어낸 언어적 상상력과 창조의 근원을 담고 있다.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끝나지 않는 강연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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