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시선] 중년 아줌마의 '보자기'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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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의 시선] 중년 아줌마의 '보자기' 예찬
  • 노경아 한국일보 교열팀장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2년 02월 08일 0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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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마지막 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놀이터 옆 공터에 재활용 쓰레기 산이 생겨났습니다. 스티로폼 산, 상자 산, 플라스틱 산, 유리병 산, 깡통 산…. 인천에 사는 언니네 집에 갔다가 밤늦게 왔는데도, 관리사무소에선 연신 방송을 내보냅니다.

"주민 여러분, 설 명절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구마다 재활용 쓰레기가 많을 것으로 사료되어 분리수거 날짜를 며칠 당겼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정해진 장소에 잘 분리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베란다에 쌓인 빈 상자, 맥주 캔, 소주병 등을 보면 답답했는데, 잘 됐다 싶어 한밤중에 온 가족이 함께 내놓았습니다. 평상시보다 서너 배 많은 쓰레기를 버리는데 죄책감마저 들었습니다.

쓰레기 산의 근원은 화려한 선물 포장입니다. 설날 일주일, 아니 열흘 전부터 택배사 직원들은 늦은 시간까지 선물 상자를 날랐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많은지 경비실 앞엔 크고 작은 상자가 나날이 쌓여갔습니다.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는 가족, 친지, 지인들끼리 선물로나마 마음을 나누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클수록 선물은 개수가 늘어나고 포장은 화려해졌을 테지요.

저 역시 전라도에 사는 지인이 보낸 선물을 설날 전날 자정 무렵 받았습니다. "택배 물량이 너무 많아 늦었다"며 고개를 숙이는 택배기사 분의 이마엔 (그 춥고 늦은 시간인데도) 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택배 물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것 같아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밥상만 한 택배 상자가 궁금해 열어 보니 '프리미엄 기프트 세트(Premium Gift Set)', '명품(名品)'이라는 금빛 스티커가 붙은, 꽤 큰 한지로 포장된 상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 상자를 여니 항아리 모양의 스티로폼이 나오고, 다시 또 그것을 여니 에어캡이 드러납니다.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으로 에어캡을 벗기니 비로소 젓갈과 무말랭이김치가 담긴 플라스틱 (작은) 통이 나타났습니다.

고운 한지로 포장된 상자, 벌집 모양의 스티로폼, 반짝이는 금색의 영어·한문 스티커 모두모두 품격 있어 보였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보호해 안전하게 온 것도 고마웠습니다. 우아한 포장은 내용물을 돋보이게 합니다. 장식을 한 겹 한 겹 벗길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토록 근사한 포장들이 내용물과 분리되고 나니 고스란히 쓰레기로 변해 부담스러웠습니다. 화려했던 겉모습이 한순간 짐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 순간 머릿속에 '보자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은 선물 포장은 보자기였습니다. 이웃 아주머니가 설날 전날 보자기에 가래떡과 계란을 싸 오시면 엄마는 내용물을 꺼낸 후 작게 잘 개어 부엌 찬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곤 설날 아침 그 보자기에 청주와 전을 싸, 내게 그 집으로 다시 들려 보냈지요. 어쩌다 눈에 미끄러져 넘어져도 찢어지거나 튿어질 일도 없었습니다.

보자기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모양이라도 다 안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네모난 상자, 길고 둥근 병, 옥수수, 계란 등 온갖 모양의 물건을 다 담을 수 있어 더없이 실용적입니다. 그저 물건을 넣는 가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쓰임이 다양하지요. 싸고 덮고 쓰고 두르고 가리고 묶고….

중장년층에게 보자기는 정겨운 '추억'입니다. 엄마를 먼저 떠나보낸 친구가 가슴 뭉클한 추억을 말합니다. "엄마 하면 보자기가 먼저 떠올라. 김장김치, 콩자반, 콩나물무침, 된장찌개로 밥상을 차리곤 늘 상보를 씌워 두셨지. '아랫목 이불 속에 밥 있어. 밥 먹고 공부해'라고 쓴 엄마의 쪽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난다."

태백을 떠나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는 "방학이 끝날 무렵 하숙집을 옮길 때마다 이불, 옷, 책을 쌌던 보자기가 생각난다. 크기별로 보자기만 있으면 뭐든지 다 쌀 수 있었지. 보자기가 좀 작다 싶으면 아부지가 무릎으로 이불을 누르고 엄마가 질끈 동여맸지."

(청소)반장을 도맡아 하던 친구도 진한 강원도 사투리로 말합니다. "나는 보자기 하니까 도시락 까먹던 생각만 난다야. ○○이는 분홍색 꽃이 수놓인 예쁜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서 댕겼는데. 그 간나(여자아이의 강원도 방언)는 지금 잘 사나 모르겠다야. 보고 싶다야. 내 첫사랑인데…."

친구 덕에 겨울이면 난로 위에 켜켜이 올려놓고 뜨끈하게 데워 먹던 도시락 맛이 떠올라 웃었습니다. '까먹다'는 속어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표준국어사전에 '까먹다'는 "껍질이나 껍데기 따위에 싸여 있는 것을 내어 먹다"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보자기를 벗기고 도시락을 먹었으니 '까먹은' 게 분명합니다.

포장의 기능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같은 물건이라도 포장하기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뭐든지 적당해야 정성이 느껴지고 아름답습니다. 지나친 포장은 자원 낭비는 물론 쓰레기 등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킵니다.

​빨강 파랑 연두 분홍 등 고운 천을 이어 붙여 만든 보자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성스러운 '친환경' 포장입니다. 서랍에 넣어두고 까먹은 보자기가 있다면 얼른 꺼내세요. 김춘수의 시 '보자기 찬(讚)'처럼 쓸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보자기에는 몬드리안이 있고 폴 클레도 있다/ (중략) 그러면서 그 표정은 그지없이 담담하다/ (중략) 그것은 그대로 또한 우리 배달겨레의 예술감각이요 생활감정이다/거기에는 기하학적인 구도와 선이 있고 콜라주의 기법이 있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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