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메멘토 모리, 로마인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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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메멘토 모리, 로마인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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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1세기부터 5세기 초반까지 지금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동부유럽, 브리타니아(영국), 히스파니아(스페인 이베리아 반도)가 로마 영토였다. 여기에다 현재의 터키와 마케도니아 인근의 메소포타미아, 중동지역,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를 아우르는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당시 영토를 보면 지중해가 내해(內海)였을 만큼 거대한 땅이었다. 4세기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통치를 해야 할 정도로 제국은 광활했다. 영토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투는 끝이 없었다. 그 땅들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곧 로마의 역사였다. 싸움에서 승리할 때마다 장군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로마시내에서는 황제 주도로 화려한 '개선식'이 열렸다. 트리움푸스(개선식.Triumphs)는 가장 로마다운 의식이었다. 승리라는 단어(triumph)의 유래다.

서기 402년, 호노리우스 황제(395-423)는 스틸리코(반달족 출신) 장군의 '개선식'을 현장에서 집전했다. 스틸리코는 북이탈리아로 쳐들어온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을 폴렌티아와 베로나에서 두 번에 걸쳐 대파시켰다. 계절이 8번이나 바뀌는 2년여 동안 수많은 전사자가 속출하고 보급이 끓기는 악조건을 버텨냈다. 결국 서고트족을 다시 발칸반도로 퇴각시키는 기념비적인 전투를 이끌었다.

전쟁 영웅을 보기 위해 이날 로마시내 포룸로마눔(로마의 명소.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사이 저지대)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몰려나왔다. 전성기 때 로마의 인구를 100만에서 130만 정도로 기록하고 있으니까 약 30만 여명이 나왔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선장군은 스틸리코였지만 성대한 잔치의 주최자는 당연히 황제였다. 승리의 공로자와 별도로 로마군 총사령관은 언제나 황제이기 때문이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30만 군중과 함께 먼발치에서 스틸리코를 지켜보았다. 개선장군은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전차를 타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만이 4두마차를 탈수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개선장군에게 특별한 대접을 하는 것이다. 행정관과 원로원 구성원들이 앞장선 가운데 행렬은 포룸로마눔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전장을 함께 누빈 지휘관, 병사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노래를 불렀다. 승리를 묘사한 선전물, 전리품을 가득 실은 수레가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월계관이 씌워졌다. 월계수 잎으로 엮여진 월계관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 승자나 황제의 머리에만 장식할 수 있었다. 이 역시 개선장군에게만은 특별히 허용되었다.

스틸리코의 얼굴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로마에서 붉은 얼굴은 신(神)이라는 표시다. 개선장군이 이교도와 야만족을 무찔러 백성의 안전을 지켰으므로 그날 하루만은 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자주색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유피테르(최고의 신 주피터)를 상징하는 독수리 장식을 들었다. 스틸리코의 어깨는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벌어지고 상승하여 활모양으로 변해갔다. 40대 중반 개선장군의 남성미와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누가 나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호노리우스 황제마저 군중들과 함께 나에게 경이로운 눈길로 박수를 보내지 않는가."

로마시민들의 환호와 박수갈채에 상기된 그의 표정은 점점 자만심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매우 특이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환영열기에 빠진 개선장군 스틸리코의 4두 마차 양 옆으로 두 명의 노예가 뒤따르면서 뭔가 주문을 계속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스틸리코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르는 두 명의 노예는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를 낮은 소리로 계속해서 주문했다. 개선장군은 흥분한 군중들을 향해 하늘로 솟아 오를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노예들의 주문을 들으면 다시 가라앉아 엄숙해지고 또 흥분하기를 반복했다.

"메멘토 모리- ",

"죽음을 잊지 말라."

그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뒤를 돌아보라. 지금은 영광의 중심에 있지만 그대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승리에 도취해 있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게 되고 그 찬란함이 끝난다는 것을 알라는 자만심의 경계주문이었던 것이다.

노예들의 주문이 없었더라면 스틸리코는 그대로 어깨가 하늘만큼 솟아올라 짧은 영화를 끝내고 파멸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의 반열에 오른듯하지만 결국 운명의 손아귀에 있는 인간임을 기억하라는 주문이었다.

▲로마시내 포룸 로마눔 전경
▲로마시내 포룸 로마눔 전경

로마에는 본래 20여개의 개선문이 있었다. 현재는 3개만 남아있었다. 티투스의 개선문(서기 81년), 세베루스의 개선문(203년),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315년)이 그것이다. 연대로 보아 스틸리코 장군의 개선식 행렬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은 1900여년이 지나는 동안 부서지고 사라져버려 지나간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 무솔리니(1883-1945)가 그의 허영심을 충족하려고 만든 퍼레이드용 대로는 고대의 유적지 대부분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모든 시대에 개선문은 어떤 존재가 정점에 올라 위대한 의미를 가지게 된 순간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로마를 보지 못한 누구라도 도처에서 개선문을 대했을 것이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나 우리나라 독립문도 로마시대 걸출한 개선문의 변형이다. 수세기동안의 전쟁과 승리를 표현할 문명사적 아이디어로 이만한 상징은 없었다.

포룸로마눔의 폐허 속에 개선문은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존재감을 차지했다. 성대한 개선식이 열렸던 광장은 세월에 풍화된 모습으로 현재를 버텨내고 있었다. 남아있는 돌기둥 몇 개와 쓰러진 벽채에 새겨진 역사는 지나간 시간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개선장군이 탄 마차의 위용도 군중들의 함성도 전설로 남았다. 덧없이 지나버린 시간 속에 가냘픈 인간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돌계단에 서서 고대와 중세 현세를 모두 담고 있는 위대한 유적을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주변의 모습들이 눈에 가득 채워질 때까지 한 구석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리고는 가로질러 반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황제의 뜻인지, 원로원의 부탁이었는지, 자신의 다짐이었는지 알 수 없는 스틸리코 장군의 겸손만이 이제 로마인의 영혼 속에 로고스로 남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60년 이상 로마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1930-) 는 로마제국이 5세기동안이나 강성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 '메멘토 모리' 정신에서 찾고 있다. 천하를 얻고 유지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겸손임을 알아냈다. 자신을 돌아보고 낮추면서 자만을 경계할 때만이 위대함으로 나아 갈수 있다고 그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에서 적고 있다.

로마를 떠나 남부 나폴리 근처 폼페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겸손과 한계를 자각하고 삼가하려던 사람들의 생각은 폼페이 유적지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터진 서기 68년 이후 지금까지 인류사에 남아 지혜를 일깨워주는 철학적 주제의 증거물이었다.

폼페이 어느 가정집 바닥에 장식된 모자이크 그림은 해골아래 6개의 삶을 가진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형상이다. 세월이 굴리는 바퀴 왼쪽에는 제법 비싸 보이는 튜닉(상체에 걸치는 고대의 의복) 과 오른쪽의 누추한 넝마 튜닉이 걸려있다. 왼쪽으로 돌면 행운이고 오른쪽으로 돌면 불행일지도 모르겠다. 폼페이 사람들에게 운명의 결정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암시하고 있다.

해골의 텅 빈 두 눈 흔적이 나를 자꾸 쳐다보며 크게 소리치는 것 같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로마의 메멘토 모리 정신은 중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상의 그림이나 바로크 미술에도 해골은 자주 등장한다. 에로니모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주재로 한 성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해골 모자이크를 밞으며 지나가던 폼페이 사람들은 날마다 메멘토 모리를 기억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성지로 미국 남서부 모뉴먼트 밸리가 꼽힌다. 거친 이 땅의 전설이 된 나바호족은 붉은 모래바위가 솟대처럼 솟아오른 평원을 누비던 주인공들이었다. 존 웨인의 '역마차'나 톰 행크스의 '포레스트 검프' 영화배경지로 더 유명한 곳이다. 신대륙에서 가장 용맹을 떨쳤던 나바호족도 메멘토 모리 정신을 대대로 가르쳤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어도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어깨를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지상의 운명을 예감하며 따뜻한 가슴으로 살기를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바랐던 것 같다. 망각하면 일깨워주고 넘치면 눌러주는 미덕으로 말이다. 인간세상에서 모든 개인의 불행한 종말이 없도록 하는 지혜의 주술이었다.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인 줄 알았으나 그것들 모두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잠깐 쓰기위해 받은 선물이었다.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 있는 구절이다.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린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역시 절정은 정오다. 이때가 지나면 모든 형체에 그림자가 생긴다. 상승과 하강의 숨 막히는 대결, 그래서 존재의 정상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아있는 시간동안 나에게 그런 시간이 다시 온다면 그때 나는 로마인과 나바호 인디언의 지혜를 떠올리면서 아주 겸손한 자세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준비하리라.

'메멘토 모리'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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