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재력가 합류 '락앤락' 김준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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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재력가 합류 '락앤락' 김준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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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타임스 인터넷뉴스팀]그의 재력 증가세를 보노라면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단기간에 억(億)대를 거뜬히 넘어 조(兆)대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황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모태' 재벌 총수에게만 가능했던 '1조 재력가 대열'에 들어간 주인공은 든든한 부모, 변변한 인맥ㆍ학맥 하나 없는 김준일 락앤락 회장이다.

밀폐용기 하나로 전 세계를 장악한 락앤락이 작년 증시에 상장하고서 주가가 치솟으면서 김 회장의 이름 앞에 '조대 부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올해 배당으로만 42억8천만원을 받는다.

경영권과 연관된 주식이다 보니 당사자는 재산은 허울 좋은 숫자라고 할 법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은 부러움, 궁금증으로 가득 찬다.

지난달 23일 김 회장을 만났을 때 손은 뭉툭했고 거칠었다. 주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에게서 '조대 재산'의 카리스마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옷과 구두 할 것 없이 수수했다.

부자를 인정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지만, 외형은 그대로였다.

작년 6월께 1조대 주식 부자에 처음 합류했을 때 김 회장은 세인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불편한 일이 많다. 심지어 20년 전 알던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기도 했다. 내 자산이 얼마인지에 신경 써본 일이 없는데 주위 시선이 부담스럽다. 어차피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이란 한계가 있지 않나."


8개월이 지난 지금, 인간 김준일의 재산은 락앤락 브랜드를 높이는 데 소비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라고 했다.


"주식부자 얘기 제법 많이 들어요. 유명세는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평가에 민감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평가는 듣고 한 귀로 흘리기로 했죠. 내 평가는 내가 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주방용품이 유행에 민감하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의 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말하기보다 듣는다. 대신 말 한마디를 할 때는 신중했다.

"전화 길게 하는 사람 보면 정말 신기해요. 요즘 말을 길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원래 짧아요."
유일하게 이를 어길 때가 있다. 회사의 미래를 얘기할 때다. 김 회장은 약 10년 후, 2020년 매출액 10조원 달성을 공표했다.

작년 매출 3879억원을 올렸고, 올해는 5500억원을 목표로 잡았다. 이론적으로 매년 50%씩 늘어야 가능한 수치다.

락앤락이 '한물갔다'고 보는 시선이 있지만, 김 회장은 이런 평가를 일축했다.

그는 "10년 후 다국적기업의 모델이 되겠다. 10조원은 보수적이다. 내가 내 회사를 제일 잘 안다. 자금이 확보되면 인수합병(M&A)이나 신사업을 하겠지만 될 수 있으면 현재사업으로 10조원을 달성하겠다. 지금 주가는 절대 만족 못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되면 1952년생 그의 지분가치는 쟁쟁한 재벌 총수들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도 어릴 적에는 통조림이 매우 맛있어 통조림 공장장을 하고 싶었고, 한국은행 근처에 살다 보니 한국은행 총재도 한때 꿈꿨다.

사업가적 DNA는 잠시였지만 부유했던 어린 시절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미국에 군수물자를 공급했다. 1940~1950년 당시 집에 BMW 오토바이가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단자, 수표를 끊던 모습을 보며 자랐죠. 살던 곳도 명동, 소공동이어서 상업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초등학생 시절 쫄딱 망했다. 대학까지 졸업한 누님들과 달리, 3남4녀의 6번째, 아들로는 막내인 그는 잘사는 집의 혜택을 거의 못 봤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쳤다. 이것저것 해보다 군대에 갔다.

뭐해서 먹고살 것인지 고민하던 27살, 수입개방화가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수입상을 해야겠는데 막막했다.

비단을 만들어 수출하던 당시 삼성보다 더 유명했던 한국생사를 찾아갔고, 김 회장은 수입제품 몇 개 유통권을 얻어냈다. 수입한 물건을 남대문 등지에 파는 중간상인 일을 했다. 락앤락의 전신인 국진유통의 출발이다.

물건은 잘 팔렸지만 김 회장은 언제든 뺏길 수 있는 유통권이 아닌 독점 유통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주변을 봤다. 외국만 나가면 주방용품을 사오기에 혈안이고 자신도 잘 아는 품목이 주방용품이었다. 무엇보다 1970년대 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수입품은 주방용품 정도에 불과했다.

확신이 섰고, 다양한 재질의 주방 제품을 들여왔다. 돈이 되자 대기업이 진출했지만 트렌드 파악, 결제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망해 나갔고, 김 회장은 '남대문의 전설'이 됐다.

내가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제조업에 뛰어든다고 할 때 `잘 살 길을 두고 미쳤다'고 했다.

생산을 시작했지만, 제조업 생리를 전혀 모른 터라 강성 노동운동에 월급을 무리하게 올려줬고 실적은 나오지 않았다.

억눌린 노동자들을 달래느라 집에서 술잔을 자주 기울여 아내는 술상을 차리는데 선수가 됐다. 김 회장은 그때 너무 많이 먹고 마신 탓에 돼지고기와 술은 지금 잘 먹지 않는다.


"제조는 다른 분야보다 3배 정도 복잡해요. 요즘도 말한다니까요. 제조회사 사장 아니고는 사장 소리하지 말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김 회장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로 꼽는 순간이다.
공장 시설 자금을 빌리면서 머리를 썼다. 가장 안정된 외화라고 판단한 스위스 프랑으로 어렵게 대출을 했지만, 갑자기 급등했다. 달러 등 다른 외화는 비슷하거나 떨어졌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원료를 전량 일본에서 사오다 보니 중요했던 엔화도 같이 뛰었다.


"악수를 둔 거죠.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생겨나는데 감당하기 어려웠죠. 이사 가고 월세 살고 제품 다 치우고…"


번 돈 다 까먹게 생기자 잠시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유통으로 돌아갔다. 판도는 달라졌지만, 그의 수완은 녹슬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제조업 3년 동안 까먹은 돈을 거의 만회했다.

국진화공에 다시 와서는 사명을 하나코비로 바꾸고, 직접 생산이 아닌 아웃소싱으로 선회했다. 안정을 찾았지만 정체였다.

'왜 그럴까?' 브랜드였다. 브랜드 인지도가 없으니 부가가치가 나오지 않았고 제품은 다양했지만, 수명이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브랜드로 밀고 갈 품목을 정해야 했다. 될 아이템을 찾기보다 되지 않는 아이템을 찾았다.

'계절에 따라 수요 편차가 큰 제품은 안된다. 부피가 크면 안 된다. 색깔이 다양하면 안 된다. 교체시기가 긴 것은 안된다.' 등 20여 가지를 제외하자 밀폐용기만 남았다. 조사에 들어가니 경쟁상대 공장만 10만군데가 넘었다.

"10만대 1의 경쟁이 아니다. 전혀 다른 콘셉트로 나가면 1대 1 경쟁이 되는 거다."


기존 밀폐용기는 몸체는 딱딱하고, 뚜껑은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 꽉 끼우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좀 더 진화된 게 딱딱한 뚜껑 양쪽에 밀폐날개(결착고리)를 단 형태였다.

김 회장은 네 면에 결착고리를 달기로 했다. 뚜껑 모양이 흐트러졌다. 결착고리를 단단하게 만드니 닫기가 너무 어렵고 부드럽게 하니 자주 끊어졌다. 회사에서도 모자라 그는 집에 실험제품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 '딱 딱' 소리가 별로 안 클 거 같은데 잠을 자려고 하면 엄청 크거든요. 집사람이 `제발 잠 좀 자자'고 했을 정도였죠."


부드러우면서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전혀 새지 않는 밀폐용기가 만들어졌다. 김 회장은 잠그단 의미의 락(lock)을 반복한 두 번 잠그단 의미의 락앤락을 번뜩 떠올린다.

제품은 만들어졌는데 반응은 썰렁했다. "기능성 제품인데 설명이 없었다. 써보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홈쇼핑으로 판로를 뚫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시회를 전전했다.

1999년 홍콩 전시회. 바이어에게 설명하기 위해 락앤락에 물을 넣어놓고 기다리던 한 직원은 심심하던 차에 그 물이 든 락앤락 통을 돌렸다. 지나가던 바이어가 이를 봤고, 세계 최대 홈쇼핑 채널인 QVC의 캐나다 채널에 소개됐다.

방송에서 락앤락통에 지폐, 휴대전화, 연기를 넣고 물이 담긴 수조에 넣었다 꺼내는 시연을 했고 대박이 터졌다. 미국, 독일로 소문은 퍼졌다.

2002년 월드컵은 국내사업에서 기회였다. 미국인이 락앤락을 들고 한국을 찾았고, 그 제품이 국내 중소기업 제품이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여세를 몰아 한국 홈쇼핑에 나갔다. 당시 락앤락이 세운 분당 매출액 1천만원은 아직도 홈쇼핑업계 전설이다.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안 알아줄까 했던 마음이 싹 없어졌습니다. 아 드디어 락앤락이 뜨는구나. '이제 됐구나' 했죠."


2003년 한국 밀폐용기 시장 규모를 락앤락 한 회사가 뛰어넘었다. 김 회장은 기뻐하기보다 '일시적인 돌풍에 의한 과수요→남은 것은 내리막길'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외국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중국에 공장을 지어 영국, 일본으로 수출했다. 세계 최대 시장 중국은 2004년부터 고급 브랜드 전략으로 파고들기 시작됐다.


마침 드라마 '대장금'이 인기를 끌자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화이루에 직영 1호점을 열었다. 연간 임차료만 5억원. 대기업조차 하기 어려운 TV 광고를 계속 했다. "곧 망할 것"이라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예상을 깨고 락앤락은 '메이드인 코리아는 싸구려'라는 인식을 바꾸고 성공했다.

중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짝퉁, 플라스틱 유해성에서 시달려야 했다. 김 회장에게 "제품 잘 쓰고 있어요" 건네는 인사말에 "아 그 제품 우리 거 아닌데요" 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차에 김 회장은 플라스틱 대신 내열유리 시장을 내다본다. 내열유리는 우주선 신소재로 쓰일 정도로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져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런 사이 경쟁사는 좀 더 쉬운 강화유리로 치고 나갔다.

"락앤락 글라스로 상표권을 등록했죠. 그런데 상대는 글라스락으로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양쪽 다 등록했어야 했어요" 후회되는 부분이다.

김 회장은 지금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365일 가운데 180~200일은 비행기에서 산다. 미래의 꿈은 자력으로 진출해 자력으로 마케팅을 하는 P&G다. 생산면에서는 제조공장 하나 없이 한결같은 질로 브랜드를 유지하는 나이키다.

"성공은 결론인데, 아직 결론은 없어요. 과정이 있을 뿐이죠. 결론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을 즐길 겁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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