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히스토리는 자연스레 그의 음악 스펙트럼을 엄청나게 넓혀 놨다. 그래서 이적은 발라드와 록, 펑크를 두루 넘나드는 국내서 손꼽히는 뮤지션이 됐다. 그런 이적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공연이다. 특히 이적은 공연에 스토리를 잘 입혀 기승전결을 잘 이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이적의 소극장 공연을 관람한 후 이적 공연은 화려한 대규모 공연보다 소극장 등의 미니멀한 공연이 더 잘 어울린다는 평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공연능력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닌, 스토리를 전달하기에 미니멀한 공연이 더 잘 어울린다는 표현에 가깝다. 그러나 이적은 이같은 생각을 불식시키라도 하려는듯 3년 연속 대규모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올해 가진 전국투어 콘서트 '거울' 역시 그에 속한다.
잔잔하게 시작해 몰아치는 파도 소리로 관객 집중도를 높인 후 패닉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로 공연 포문을 연 이적은 역시 공연명가 뮤직팜 소속답게 조명의 활용도를 극대화한 모습을 보였다.
파도 소리가 울려퍼지기 전, 즉 공연 시작 전부터 공연장에 연기를 자욱하게 깔았는데, 이는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에서 쓰인 레이저와 어우러져 마치 구름이 공연장에 내려앉은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코러스 파트에서 실루엣을 강조한 조명으로 과감하게 전환한 것과 후렴 부분에서 조명으로 웅장한 분위기를 극대화한 것에서 첫 곡부터 관객의 집중도를 휘어잡고 가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두 번째 곡인 '태풍'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 곡에 투입된 물량만으로는 기자가 올해 본 공연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모든 조명과 레이저가 이 곡에 투입됐다고 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연출에 활용됐는데, 연주되는 음 하나하나마다 변화하는 조명은 대규모 물량의 적절한 활용이라고 평하는 것이 맞다고 보인다. 대규모 물량을 투입하고도 과해서 부담스럽다는 느낌 혹은 대규모 물량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의 연출을 보여주는 경우도 자주 접하는데, '태풍'에선 이를 잘 조율한 느낌이 있다.
불꽃축제에서 한국팀 클라이맥스 BGM으로 사용돼 뿌듯했다고 말해 웃음을 준 '불꽃놀이'로 관객들 마음을 뒤흔든 이적은 곧 다시 잔잔한 분위기로 전환했다. 이어진 선곡은 이적의 표현을 빌자면 "겨울에 부르면 마음이 더 추워지는 노래"인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의외로 이 곡의 배경에 대해 모르는 리스너들이 많으나, 잘 알려져 있듯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은 버려진 아이를 생각하며 쓴 곡이다. 그러나 이적의 말처럼 누군가는 자신의 반려견, 반려묘를 생각하며,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해석하기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에서 음악이 주는 의미,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적이 국내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데는 이런 심리를 후벼파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자주 들리던 곡이지만 원곡보다 다소 재지한 변박을 가미해 듣는 재미를 더 높인 'Rain'은 공연장을 가득 채운 이적의 보컬 때문에-기자 개인적으로는 'Rain'을 이적의 목소리와 가창력이 가장 잘 어우러진 곡으로 꼽는다-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백스크린의 영상미가 빛났다. 곡 제목처럼 비가 한두방울씩 오듯이 노래 초반부터 흰 빛줄기가 하나둘 천천히 내려오다 조금씩 많아지면서 결국 광활한 백스크린을 가득 채운 흰 빛줄기의 효과는 곡이 절정으로 갈 수록 실제 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과 맞물려 더 큰 울림을 전했다.
팬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간략한 손편지는 스크린 전면에 하나둘씩 채워지며 관객들에게 있어 자신의 '나침반'같은 의미를 지닌 소중한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여기에 이적은 자신의 '나침반'같은 팬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의미를 그만의 작사 스타일처럼 함축적으로 꾹꾹 눌러담아 '내게 힘을 주는지도 모르고 힘을 주는 당신-이적'이라는 메시지로 표현했다. 팬들이 보낸 많은 메시지 중 공연에 소개되지 못한 내용은 공연 후 따로 영상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기타를 잡은 김에 '나침반'에 이어 '걱정말아요 그대'를 부른 이적은 "많은 사랑을 받아 내게도 특별한 노래가 된 '걱정말아요 그대' 전인권 선배 버전에선 오리지널 버전에 없던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라는 가사가 있었다. 리메이크를 하면서 꼭 이 부분은 부르고 싶었다. 지나간 과거만이 아닌,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는 이적에게선 가사를 통해 인생과 사회를 관통하는 그의 가사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미안해'와 '다행이다'로 다시 한 번 분위기 전환을 한 이적은 "만들어놓고 귀여워한 노래가 있다. 피아노에 앉은 김에 불러보려 한다. 마치 제 작업실 놀러온듯 즐겨달라"며 '뿔'을 부른 뒤 자연스레 '노래'와 밴드 소개까지 마쳤다. 이 부분에서 이적은 "밴드 소개에서 세션들이 솔로를 진행할 때 박수를 쳐주는 선진 공연 관람문화"라고 얘기했는데, 이적의 공연과는 별개 얘기지만 이처럼 공연 위주의 아티스트들은 공연문화뿐 아니라 관람문화까지 선도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만해도 촬영이 금지된 공연에서조차 공연 중 촬영은 매우 당연시 여겨졌고, 밴드 소개는 화장실 가는 시간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공연 중심의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선한 영향력을 활용해 공연 중 자연스럽게 성숙한 관람문화를 유도해야 할 책임도 있다. (관객들 지각에 대해서도 공연시간이 되자마자 출입을 차단하는 등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본다. 아티스트들의 정시 공연이 이뤄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객들의 지각이다.)
'압구정 날라리', '하늘을 달리다', '왼손잡이'로 관객 떼창을 유도하며 영하의 추위를 이기는 열광적 분위기를 조성한 이적은 이어진 앵콜에선 역시 관객 떼창이 빛났던 'UFO'와 '로시난테'로 130여분간 22곡의 주옥같은 레파토리 속에 이어진 '거울' 공연을 마무리했다. 끊임없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관객들에 고마움을 표한 이적은 내년 '흔적-part 2'로 찾아오겠다는 선물같은 메시지로 환호를 자아냈다.
알듯말듯 많은 의미를 함축한 오묘한 이 메시지는 마치 이적의 가사같다. 이적의 가사는 직관적이기보다 한번쯤 곱씹었을 때 그 안의 쌉싸름한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다. 앞서 이적은 미니멀한 공연이 더 어울린다는 평을 했는데, 공연에 쓰이는 효과가 적을 수록 이같은 이적의 가사가 주는 메시지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더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거울' 공연을 본 뒤 이적은 보는 재미를 주면서도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을 참 잘 아는 영리한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16년 11월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전국 투어 콘서트 '울려퍼지다'를 열고 부산, 대구, 광주에서 3만 관객과 조우해 저력을 과시한 이적이 2015년에서 2016년에 걸쳐 '2015 이적 소극장 콘서트-무대'로 1년간 팬들을 만나면서 소극장과 대극장을 오가는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한 것, 이적은 본인의 스타일을 충분히 잘 구축했다.
본인의 음악인생사만큼이나 드넓은 음악 스펙트럼을 공연에 잘 녹여낸 이적은 이제는 대형 공연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탁월한 방법도 안다. 연말 공연 '거울'의 가장 마지막 곡을 다른 곡도 아닌, 꿈을 노래하는 '로시난테'로 선곡한 것. 노래와 가사로 인생과 사회를 관통하는 이적이 주고자 하는 선물같은 메시지는 관객들에게 따뜻하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게 '이적표 음악'의 거대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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