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이따금 남의 수준을 평가한다. '저 사람은 흐름에 발 맞춰 사는구나', '이 자는 옛날 사람 같아'.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저자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신속하게' 내려진다. 그런데 동시에 의문이 든다. 'CEO가 어떻게 거북이 마냥 느릴 수 있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CEO는 명석하고 지혜롭고 셈이 빠른 유형의 사람으로 떠올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다수고,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자질은 기본 소양이 아니겠냔 말이다.
제목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자는 그런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다. 그에 대한 옛날 얘기부터 꺼내자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 "너는 머리가 나쁘니 굳이 대학 갈 생각하지 말고 대학 나온 사람 쓰는 일을 해라".
그는 학창시절 열등생이었다. 학급에서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하는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입시에서 줄줄이 낙방했다. 어머니가 쌀 한 가마니로 거래한 덕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4년제 대학은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고 단기 대학에 운 좋게 추가 합격했지만 학업은 늘 뒷전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광고 회사에서도 영업 실적은 최하위였다. 결국 6개월 만에 잘렸다. 사정사정해 재입사했지만 결국 반년을 못 버티고 퇴사 당했다. 그에겐 희망이 없어 보였다.
뭐라도 해 먹고 살자는 생각으로 연 게 가구점이었다. 하지만 대인공포증이 있어 손님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회사는 당연히 적자를 이어갔다. 그렇게 늘 '루저'같은 삶을 살 것 같았던 그의 일상에 변곡점이 나타났다. 한 컨설팅 회사의 주도로 다녀오게 된 '미국 가구업계 시찰 여행'이었다.
고국 일본보다 훨씬 앞선 미국 시장을 목격한 그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미국의 풍요로움을 일본에 전하고 싶다, 일본인도 미국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하고 싶다'. 저자는 이 때가 지금 자신의 성공을 부른 첫 번째 요소로 꼽는다.
그는 "내 힘으로 사람들 월급을 세 배 올려주기 힘들지만, 가구 가격은 3분의 1로 낮출 수 있지 않을까"라고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주거 환경을 자유롭게 꾸미고 바꿀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금의 그는 이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면 그의 가구점은 고만고만한 동네 여타 가구점들과 경쟁하다 어느 순간 공중 분해됐을 거라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망한 가구점들의 가구를 싼 값에 사들여 되팔다 도매상의 감시를 받고 범죄자처럼 운영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장이 됐다고 똑똑해지지 않듯, 그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고 회사 운영 능력에 의구심을 가진 직원들은 하나둘 직장을 그만뒀다. 새로운 아이템 도입은 몇 년 간 적자를 면치 못하기도 했다.
그는 "내 자신이 늘 '꼴찌'라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아를 비우고 남의 장점을 흡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전형적인 사례인 것. 이 같은 태도로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한 그는 당시 자국 업계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시스템 구축, 해외 공장 건설 등 돌파구를 개발했다.
이쯤에서 그가 일군 회사를 소개해야겠다. 1967년 회사 전신인 '니토리 가구점'에서 시작된 일본 유통업계 1위 기업 '니토리'다. 일본이 극심한 경제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인 1990년대말~2000년대초 '잃어버린 20년' 중 일부 기간엔 623% 성장(매출액 기준)을 달성했다. 나라에선 저성장 파고를 이겨낸 대표적 불사적 기업으로 꼽고 있다.
미국, 중국, 대만에 걸쳐 437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고, 지난해 한 해 동안 6500만명이 니토리 제품을 구매했다. 연 매출은 5129억엔(5조1290억원). 지난 2월 기준 '30년 연속 매출·이익 증가'를 기록해 일본 4000여개 상장사 중 1위를 차지했다.
'뭘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모두가 몰두하고 있을 때 그는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불가능이라 여겨진 성취를 일궜다. '거북이 CEO'는 장기 저성장의 초입에 들어선 우리 기업들에도 좋은 본보기와 비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