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 때문이야" 연극 '연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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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 때문이야" 연극 '연애시대'
  • 노오란 객원기자 pro_ntier@naver.com
  • 기사출고 2013년 11월 01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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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플레이

인간이 공유하는 시간의 집합은 '시대'로 규정된다. 현대를 가리켜 '○○시대'라고 단번에 짚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 석학들조차 명쾌하게 동시대를 정의하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많이 배울수록 '정의'가 아닌 '해설'을 풀어놓기 마련이다.

'○○시대'의 빈 칸을 채워 넣은 '용자'가 있다. 용기의 원천은 소설과 드라마로 대중에게 익숙한, 연극 '연애시대'다. 혹자는 '연애시대'라는 말에 코웃음을 칠지 모른다. 사랑 따위로는 이 복잡다단한 사회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신념이랄까. 하지만 연극 '연애시대'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신념도 바뀔 것이라 믿는다.

싸우는 여자, 도망가는 남자의 '최후'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성가이자 가곡으로 널리 불리는 '사랑은 언제나'의 노랫말이다. 아쉽게도 연극 '연애시대'에서 이 노래는 틀렸다. 이 곡이 맨 처음 성가로 지어진 이유는 그 사랑이 성자들이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 '연애시대'의 인물들은 '성자'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를 아프게 노려보는 일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이다.

'하루'와 '리이치로'는 사랑의 결실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들은 여느 부부와 같이 소중한 생명을 품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아이는 사산되고, '하루'와 '리이치로'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전(前) 부부는 완전히 이별하지 않은 듯 기이한 생활을 이어간다. 이들은 자주 가던 카페나 술집에서 만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말은 언제나 마음과는 반대로 튀어나온다. "이 사람 괜찮은데, 한 번 만나 봐."

'하루'는 싸우고 싶지만 싸우지 않는 여자다. '리이치로'는 도망가고 싶지 않지만 도망가는 남자다. 이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서로를 견제한다. 이들의 갈등은 엉뚱하게도 다른 데서 터진다. '마음에도 없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해서다. '너와 끝까지 싸워 보고 싶어', '난 도망친 게 아냐' 라는 무언의 울림은 언제나 가슴 언저리에만 머문다.

'하루'는 원래 싸우는 여자였다. '리이치로'가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거나 시장을 잘못 봐왔을 때 그녀는 싸웠다.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쪽은 항상 '하루'였다. '리이치로'는 그들의 아이가 사산됐을 때 '하루'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헤어진 건 죽은 아이 때문이 아니다. 하나도 안 괜찮은 자신을 괜찮다고 속이는 일이, 그런 서로를 바라보는 게 못할 짓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쇼플레이

'연애시대'가 연극으로 분한 이유

연극 '연애시대'는 일본 작가 '노자와 히사시'가 1998년에 펴낸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연애시대'는 2006년 손예진, 감우성 주연의 드라마로 각색돼 전파를 탔다. 이미 두 차례나 대중 앞에 선 '연애시대'가 무대로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시대'의 플롯은 두 사람의 시선이 균등하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연극은 대개 '막'이라는 기막힌 마법을 가지고 있다. 막과 막이 전환되면서 암전이 되고 관객은 그 사이 호흡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연극 '연애시대'는 '하루'와 '리이치로'의 속내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작품은 암전 속에서 아크릴 전광판을 빌려 불빛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나열이 아닌 교차의 방식으로 점층된다.

'하루'는 '리이치로'의 결혼식 축사를 낭독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아이가 사산되던 날 '리이치로'가 자신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님을 축사 직전에 알았다. '리이치로'는 씩씩하게 신랑 행진을 하다 말고 두 사람을 아프게 한 '그 날'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이 장면은 '하루'와 관객들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

연극은 다른 장르보다 관객의 시공간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에서는 시공간의 변화를 자유롭게 구현하지만 무대 예술은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는 연극 '연애시대'가 소설이나 드라마에 비해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가장 완벽히 섞을 수 있는 장점이 된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리이치로'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이러한 장점이 극대화된다.

탁월한 연기에 비해 다소 아쉬운 무대

'리이치로'로 분한 배우 김재범은 빈틈없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루'가 떠난 뒤 내뱉는 그의 독백은 힘을 뺐지만 텅 빈 읊조림이 아니었다. 그의 대사 뒤에는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분명한 목적이 실려 있었다. 배우 손지윤은 하고픈 말을 억누르는 '하루'의 캐릭터를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하루'가 '싸우는 여자'로만 부각되는 듯한 대사 처리는 조금 아쉬웠다.

연극 '연애시대'에는 조연들의 연기도 빛났다. '하루'와 '리이치로'가 각각 만나게 되는 2명의 애인은 남녀 1명의 배우가 1인 2역을 펼치며 여운을 남겼다. 두 사람의 친구 '가이에다'와 '사유리' 역을 맡은 배우 윤경호, 황미영은 감초 역할을 자처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극 후반부의 하중을 덜었다.

연극 '연애시대'의 무대는 아담하면서도 극의 전개에 활동성을 더했다. 넓지 않은 소극장 무대에 개폐식의 세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루'의 아버지가 라디오 DJ로 있는 스튜디오를 불명확하게 표현한 점, 암전 중 나오는 아크릴 전광판이 너무 객석과 가깝게 설치돼 가독성이 떨어진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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