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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흙수저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

 

420년은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 긴 시간동안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영웅으로 남아 자리하기는 더욱 어렵다. 미천한 천민에서 최고의 통치자까지 올라가본 시대의 풍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오래된 사당에서 고요하게 가을을 맞고 있었다. 흐린 하늘아래 몇 개의 꽃바구니와 향불의 여운이 멀어져가는 그의 혼백을 붙잡아 두려는 듯. 후세사람들의 솜씨로 마련된 초상화의 눈동자가 유난히 강렬하다. 나가무라(中村)는 그의 고향이다. 오사카와 도쿄의 중간도시 나고야(名古屋)역에서 20분 거리다. 도요타 자동차 본사로 나가는 길목이다. 지금은 시내로 편입되어 도시가 되어버린 동네지만 아직 번잡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근처 노리다케(일본의 세계적 도자기회사)파크와 함께 방문객들이 이어지는 곳이다. 나가오카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도요토미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공원밖에는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 문(鳥居. 도리이)이 하늘높이 우둑 솟아 있다. 붉은색 네 기둥이 풍신(도요토미)과 나고야의 결연을 보는 듯하다.

소박한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기념관에는 전성기 때 동아시아전쟁(임진왜란)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나고야는 총사령부였다. 포르투갈식 조총으로 선진화된 16만의 육군과 수군을 조선반도에 출정시켰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평양을 점령했다는 전갈보다 더 놀란 것은 선조의 몽진(蒙塵.왕의 피난)이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조정을 버린 채 도망 길에 오른 조선왕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기록 앞에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이곳에서 모든 명령을 내렸다.


   
▲나고야 시내 나가무라 공원 도요토미 신사

 

볼품없는 얼굴 때문에 도요토미의 어린 시절 이름은 ‘고자루(小猿. 원숭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대머리 쥐’ 로 통했다. 풍채나 분위기가 당시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출신 그대로의 모습이 온몸에 붙어 다녔다. 전사한 아버지대신 어머니의 재가로 맞은 양아버지의 모진 학대는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가출과 방랑으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유다. 바늘 장사와 행상으로 연명했다. 어느 날 지나가던 당대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행차 앞에 드러누워 버텼다. 이상하게 여긴 오다는 부하들의 칼끝을 제지시키고 이유를 물었다. “너무 가난해서 살수가 없으니 제발 죽여 달라”는 게 도요토미의 애원이었다. 오다는 이 못생긴 ‘원숭이’ 를 변소지기로 데려갔다. 입신의 시작이다.

다음날부터 변소가 달라졌다. 냄새는커녕 지푸라기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해졌다. 감동한 오다는 그를 몸종으로 올려 보내도록 명했다. 추운 겨울날 짚신을 가슴팍에 묻어 품고 데워서 내려놓는 충정은 주군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오다 가문은 모두가 그를 인정했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오다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는 난세의 해결사가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를 끝내고 통일 일본의 위업을 달성했다.

조선 조정이 당파싸움에 몰두하고 있을 때 미추한 장군 도요토미는 최고의 정치로 세상을 바꿨다. 무기를 몰수해 농민들을 본업으로 돌아가게 한 병농분리정책은 일본 정책사의 모델이다. 대대적 토지조사는 균형 잡힌 녹봉배분을 가능하게 했다. 토목공사와 유통 장려는 상인계급을 등장시켰다. 혼란하고 볼품없던 나라 일본을 도약대로 끌어올린 상책(上策)들이다. 이때 한몫 쥔 상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그의 선택에는 탈출구가 없었다.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과 명을 쳐서 그 공적으로 일본 전체의 공식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화근이 되어 병을 얻고 후대도 끓겨 버렸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근본을 감추고 싶은 천민출신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어지러운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열도를 재패한 주인공까지 올랐지만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숨기고 싶은 과거 때문에 평생을 만들어진 가식의 성안에서 살았다. 입신과 출세, 위용 뒤에는 늘 불편한 비천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꾸며내고 분칠된 영웅의 뒷모습은 그래서 항상 초라함이 묻어 있었다. (패왕의 가신. 시바 료타로)

 


   
▲오사카성 천수각 남문앞 도요구니(豊國) 신사의 히데요시 동상 앞과뒤

 

나고야는 고향사람 도요토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16세기 최고의 인물로 대접한다. 하지만 나가무라 신사는 소박함을 넘어 초라했다.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로 280년 동안 에도막부정권을 이어간 도쿠가와의 신사 도조궁(東照宮. 도쿄 근처 닛꼬에 위치)과는 비교되는 분위기다.

하층민 출신으로 일본 역사상 가장 출세한 인물, 치세와 지략가, 상업 장려로 일본 자본주의를 싹틔운 장본인, 자신만만한 야심가. 모순의 영웅,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음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정유재란 중 후시미(伏見)성에서 병사했다. 짧은 그의 묘비명은 인간의 허무를 노래하는 한편의 시 같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인가

살아온 한세상이

봄날의 꿈만 같다.
 

도요토미의 유언장은 오사카에 남겨졌다. 갑옷은 센다이 박물관에, 말안장과 칼은 도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울지 않으면 죽인다” 는 오다와 “울 때 까지 기다린다” 는 도쿠가와의 접근과 달랐다. 울도록 한다는 전략속에는 공격적, 창조적, 진취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요즘 세상까지 이어지는 메시지다.

천민출신의 탁발승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웠다. 5천년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민중의 아들‘ 이었다. 평민 유방은 족보 있는 가문의 수장 항우를 잡고 세상을 평정했다. 진나라 학정에 못 이겨 반란에 나선 농민 진승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 고 절규했다. 도요토미는 확실히 ‘흙수저 스토리’ 의 한 페이지다. 한일관계의 복잡한 과거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이성의 눈으로 인간 도요토미를 들여다 본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치세와 출신은 큰 인과관계가 없는 것 같다. 역사가 일러주는 사실이다. 지금 무너져 내리는 한 대통령의 딸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